프랑스 상파뉴(Champagne) 지역에는 수많은 샴페인 하우스가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앙드레 끌루에(André Clouet)'만큼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곳은 드물다. 와인 병을 감싸고 있는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레이블은 단순히 마케팅을 위한 디자인이 아니다. 이는 300년을 이어온 가문의 정체성이자 역사적 긍지를 표현한 것이다.
앙드레 끌루에 가문의 선조는 18세기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 시절, 베르사유 궁정에서 국왕의 명을 받아 서적과 문서를 제작하던 '왕실 전속 인쇄 기술자'였다. 당시 인쇄술은 단순히 지식을 전파하는 수단을 넘어 왕실의 권위를 세우는 고도의 예술적 영역이었다. 정교한 금속 활자를 심고 로코코 양식의 화려한 문양을 새겨 넣던 그들의 완벽주의는 1741년 가문이 와인 양조로 전업한 이후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현재 앙드레 끌루에를 이끄는 장 프랑수아 끌루에(Jean-François Clouet)는 조상들이 남긴 고서의 도안과 타이포그래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레이블에 녹여냈다. 덕분에 애호가들은 와인을 마시기 전, 마치 18세기 프랑스 왕실의 귀중한 서적을 손에 쥔 듯한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가문의 권위와 기술, 그리고 장인 정신이 종이 위의 활자에서 샴페인의 레이블로 맥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앙드레 끌루에의 본거지는 샴페인 지역 최고의 산지로 꼽히는 '부지(Bouzy)' 마을이다. 이곳은 마을 전체가 최고 등급인 '그랑 크뤼'로 분류된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다. 힘 있고 남성적인 피노누아를 생산하는 곳으로 명성이 높다.
부지의 피노누아가 다른 지역보다 탄탄한 구조감과 강렬한 미네랄 풍미를 지니는 비결은 지질학적 특성에 있다. 두꺼운 백악질 토양층은 낮 동안의 열기를 보존했다가 밤에 방출하며 포도의 완숙을 돕고, 뛰어난 배수 능력으로 포도나무 뿌리가 영양분을 찾아 깊게 뻗어 내려가게 한다. 상파뉴 지역은 전반적으로 서늘한 기후를 띠지만, 부지는 남향과 남동향 경사면이 많아 일조 조건이 매우 우수하다는 점도 큰 강점이다.
'앙드레 끌루에 상파뉴 실버 브뤼'는 이 가문의 스타일을 가장 정석적으로 보여주는 논빈티지(각각 다른 해에 양조한 와인을 섞은 것) 샴페인이다. 이 와인의 가장 큰 특징은 샴페인 양조의 마지막 관례인 당분을 첨가하는 '도사쥬(Dosage)' 과정을 과감히 생략했다는 점이다.
보통 당분을 추가하지 않으면 맛이 지나치게 날카롭게 느껴질 수 있지만, 앙드레 끌루에는 독특한 양조 기법으로 이를 극복했다. 프랑스 보르도의 달콤한 디저트 와인 '소테른(Sauternes)'을 숙성했던 오크통에서 와인을 일부 숙성해 블렌딩하는 방식이다. 소테른 배럴은 와인에 입체감과 풍부함을 더하며, 설탕 없이도 부드럽고 풍성한 질감을 완성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실버 브뤼는 논빈티지임에도 불구하고 병 내 효모 숙성 기간을 법적 기준보다 길게 가져감으로써, 갓 구운 빵의 고소한 향과 견과류의 풍미를 와인 속에 새겨 넣는다. 법적 최소 숙성 기간은 15개월이지만, 앙드레 끌루에의 모든 와인은 최소 3~4년(36~48개월) 이상 효모 숙성을 거친다.
아울러 앙드레 끌루에는 껍질의 색소가 과즙에 배어 나오지 않도록 전통적인 바스켓 압착 방식을 고수한다. 이를 통해 피노누아 특유의 붉은 과실 풍미와 묵직한 바디감은 살리되 맑고 투명한 황금빛 액체를 얻어낸다. 이러한 정교한 추출 과정은 과거 한 자 한 자 활자를 심어 오차 없는 인쇄물을 만들어내던 가문의 장인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그 결과 실버 브뤼는 레몬과 사과, 복숭아 등 풍부한 과실 향과 함께 상큼한 목넘김, 그리고 은은하고 부드러운 기포를 선사한다. 이러한 품질은 전문가들로부터도 높게 평가받아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 92점, 제임스 서클링(James Suckling) 93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2025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선 스파클링 와인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특유의 드라이하고 깔끔한 맛 덕분에 캐비어, 연어, 스시와 같은 신선한 해산물은 물론 부드러운 치즈와도 잘 어울린다. 국내 수입사는 신세계엘앤비(L&B)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