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개봉한 영화 '비포 선셋'에서 주인공 두 사람은 9년 만에 다시 만나 파리의 골목과 강변을 걸으며 각자의 삶과 관계의 결을 조심스레 나눈다. 긴 대화 중에 여자 주인공 셀린느는 "과거를 굳이 마주하지 않아도 기억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고 말한다. 현재의 순간을 소중히 여기면서 기억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을 그대로 인정하는 장면이다. 시간이 쌓이며 비로소 드러나는 감정의 깊이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이 대사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여운을 남기며 널리 회자하고 있다.

와인을 마실 때도 비슷한 순간이 있다. 포도나무가 한 해 동안 견뎌낸 계절과 일조량, 바람, 기온의 흔적이 한 잔 속에 온전히 담기기 때문이다. 포도는 급하게 익으면 향과 구조를 잃지만, 천천히 익어갈수록 밀도를 갖추고 균형을 이루게 된다. 특히 해안 산지에서 재배된 샤르도네는 낮과 밤의 온도 차, 해풍의 흐름, 해안의 냉랭한 공기가 차곡차곡 축적되며 그 지역만의 선명한 풍미를 형성한다. 천천히 쌓인 시간이 결국 와인의 성격이 된다.

칠레 아콩카구아(Aconcagua) 해안은 이러한 '느린 성숙'이 구현되는 대표적인 산지다. 칠레 북서쪽, 태평양에서 불과 10㎞가량 떨어진 이 지역은 해양성 기후의 영향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해류와 해풍, 아침 안개는 낮 동안 포도의 온도를 낮추며 산미를 지켜준다. 밤에는 냉기와 큰 일교차가 포도 성숙 속도를 늦추며 향을 응축시킨다. 덕분에 이 지역에서 자란 샤르도네는 산도가 유지되고 미네랄감이 뚜렷하며, 다른 산지의 샤르도네보다 단단한 구조와 선명한 인상을 남긴다. 에라주리즈 설립자 돈 막시미아노 에라주리즈가 1870년 이곳을 보고 와이너리 건립을 결심한 이유도 이런 잠재력 때문이다. 이후 에라주리즈는 1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콩카구아 밸리의 기후·토양·지형 연구에 매진하며 칠레 프리미엄 와인의 방향을 제시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가능성이 국제적으로 조명받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 와이너리가 국제적 주목을 받은 결정적 계기는 2004년 열린 '베를린 와인 테이스팅(Berlin Tasting)'이다. 블라인드 방식으로 진행된 이 행사에서 에라주리즈가 만든 아콩카구아 밸리 와인들이 샤토 마고, 샤토 페트뤼스, 샤토 라피트 로칠드 등 프랑스 최고급 와인을 앞지르는 결과를 보였다. 1976년 '파리 테이스팅'이 미국 나파 밸리를 세계 무대에 올려놓은 사건이었다면, 베를린 테이스팅은 칠레가 '가성비의 나라'를 넘어 프리미엄 와인 생산국으로 인정받는 전환점이 됐다.

그래픽=정서희

'에라주리즈 에스테이트 리제르바 샤르도네(Errazuriz Estate Reserva Chardonnay)'는 아콩카구아 해안이 가진 잠재력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와인이다. 포도는 저온 상태에서 수확해 신선한 향을 유지한 채 와이너리로 운반되며, 전체 압착 후 발효에 들어간다. 발효는 섭씨 14~17도에서 10~15일간 진행된다. 대부분 스테인리스 탱크에서 발효하지만, 약 15%는 한 번 사용된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발효해 질감과 구조를 은은하게 더한다. 젖산 발효는 진행하지 않으며, 이후 5~8개월간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숙성해 산도와 균형감을 유지한다. 신선한 과실 향을 중심에 두면서도 입안에서의 구조감을 놓치지 않는다.

완성된 와인은 황금빛을 띤 밀짚색을 보인다. 코에서는 꽃향기와 열대 과일 향이 어우러지고, 뒤이어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선명하게 올라온다. 입안에서는 시트러스 풍미가 먼저 자리 잡고, 익은 배와 건과일, 은은한 견과류 향이 뒤따른다. 생생한 산도와 신선한 과일 풍미가 전체를 이끌며, 우아하고 길게 이어지는 여운을 남긴다.

구운 기름진 생선, 마늘 향이 밴 해산물, 오븐에 구운 가금류와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크림 소스 파스타나 버섯 리소토(리조또)처럼 부드러운 질감의 요리와도 조화를 이룬다. 브리·카망베르 같은 섬세한 치즈와의 궁합도 좋다. 2025 대한민국 주류대상 신대륙 화이트 와인 부문 대상을 받았다. 국내 수입사는 아영FBC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