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은 영토를 확장하며 유럽 전역에 수많은 도로를 건설했다. 그중에서도 '비아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Via Claudia Augusta)'는 이탈리아 북부를 지나 알프스를 넘어 오늘날의 독일 남부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통로였다. 군사와 상인, 그리고 와인·올리브유·향신료 등이 이 길을 따라 이동하며 남유럽의 문화를 북쪽으로 전했다. 이 길목에 자리한 트렌티노-알토 아디제 지역은 고대로부터 남과 북을 잇는 관문이었고, 산맥과 호수, 사과 과수원, 중세 성채가 이어지는 풍경은 지금도 그 역사적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트렌티노-알토 아디제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포도 재배에 이상적인 지역으로도 알려져 있다. 현재 독보적인 화이트 와인 산지로 인정받는다. 여기에는 자연 환경의 역할이 크다. 이 지역은 '오라 델 가르다(Ora del Garda)'라는 독특한 바람의 영향을 받는다. 가르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따뜻하고 건조한 바람은 포도밭의 습기를 말리고 병해를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반면 밤에는 기온이 빠르게 떨어져 포도의 향과 산미가 선명해진다. 알프스 계곡 특유의 맑은 공기와 강한 일조량, 극명한 일교차는 트렌티노-알토 아디제 화이트 와인의 '맑고 깨끗한 과실 향'을 만들어내는 핵심 요소다. '캐빗 컬렉션 피노 그리지오(Cavit Collection Pinot Grigio)'는 알프스 기후가 빚어낸 산뜻함을 정직하게 담아낸 대표적인 와인이다.

캐빗은 단일 와이너리가 아니라 트렌티노-알토 아디제 전역에 흩어진 여러 협동조합 와이너리와 수천명의 포도 농가가 연합해 만든 대규모 생산 조직이다. 이는 이 지역의 전통적인 농업 구조로, 고지대·계곡·강 주변 등 다양한 지형에서 재배된 포도를 모아 안정적인 품질을 유지한다. 이러한 협동조합 시스템은 넓은 지역에서 포도를 공급하기 때문에 기후 변화가 있더라도 균질한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농가들이 오랜 세월 지켜온 재배 관행과 지형적 특성을 그대로 살린 포도가 수집되기 때문에, 이 지역 화이트 와인의 산뜻함과 선명한 산미가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픽=정서희

이러한 구조 덕분에 캐빗은 1970년대 후반 미국 시장에 피노 그리지오를 처음 소개한 주요 생산자로 자리 잡았다. 당시 미국에서 소비되던 이탈리아 화이트 와인은 이탈리아 북부 소아베 지역 중심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캐빗과 트렌티노-알토 아디제 기반의 와이너리들이 보다 가볍고 산뜻한 피노 그리지오 스타일을 앞세워 소비자들의 취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후 피노 그리지오는 일상에서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대중적 화이트 와인으로 성장했고, 캐빗 컬렉션 피노 그리지오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이탈리아 화이트 와인으로 꼽힌다.

피노 그리지오 품종은 프랑스에서 유래했지만,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스타일을 완성한 지역은 트렌티노-알토 아디제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 지역의 고산 기후는 피노 그리지오의 장점을 극대화한다. 과도한 농축감 대신 밝은 산미, 정제된 과일 향, 가벼운 구조가 특징이며, 대체로 부담 없이 마시기 좋은 데일리 화이트 와인으로 평가된다. 다양한 음식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는 점도 장점이다.

'캐빗 컬렉션 피노 그리지오'는 100% 피노 그리지오로 만든다. 선별된 포도를 첨단 온도 조절 탱크에서 저온 발효해 과실 향과 신선함을 최대한 보존한다. 오크 숙성 없이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양조해 품종 고유의 섬세하고 깔끔한 구조가 그대로 드러난다.

밝은 밀짚색으로, 잔을 들면 레몬과 라임 같은 시트러스 향이 먼저 피어나고 뒤이어 배와 청사과의 신선한 과일 향, 섬세한 흰 꽃의 뉘앙스가 은은하게 겹쳐진다. 드라이하고 가볍지만 산미가 또렷하게 살아 있어 입안에서 산뜻하게 흘러간다. 여운은 길지 않지만 청량감이 있어 깔끔한 마무리를 보여준다. 식전주로 즐기기 좋고, 크림소스 파스타, 리조또, 송아지고기, 닭고기, 신선한 해산물 등과도 잘 어울린다. 2025 주류대상 구대륙 화이트 와인 부문 대상을 받았다. 국내 수입사는 올빈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