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식품기업 오너가(家) 3·4세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내수 시장 정체와 원가 상승 부담 속에서 글로벌 경영 확대에 힘을 쏟을 전망이다.
10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SPC그룹은 최근 인사에서 허영인 회장의 장남 허진수 부회장과 차남 허희수 사장을 나란히 승진시켰다. 허 부회장은 파리바게뜨 해외 사업을 총괄해 왔다. 미국·유럽·동남아시아 등 11개국 590여 개 매장을 운영하면서 글로벌 시장 공략을 주도한 만큼, 미래 SPC의 큰 그림을 그릴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혁신 컨트롤타워 'SPC 변화와 혁신 추진단' 의장도 맡아 그룹 쇄신 작업을 이끌고 있다.
허 사장은 배스킨라빈스와 던킨의 혁신을 주도하고 글로벌 브랜드 도입·디지털 전환 등 신사업을 이끌어 왔다. 미국의 대표 멕시칸 푸드 브랜드 '치폴레'를 국내와 싱가포르에 들여오는 등 그룹의 신성장 동력 확보와 글로벌 경쟁력 제고를 위한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신동원 농심(004370)그룹 회장의 장남인 신상열 농심 미래사업실장(전무)은 그룹의 신사업 전략을 총괄하고 있다. 라면 중심의 사업 구조를 건강기능식품·스마트팜 등 비(非)라면 영역으로 개편하고 미국·중국·동남아시아 등에서 현지 맞춤형 제품 개발과 R&D(연구·개발) 투자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신 회장의 장녀 신수정 상무는 상품마케팅실에서 음료·신제품 전략을 맡고 있다. 차녀 신수현 선임은 디지털 마케팅팀에서 온라인 채널 전략을 담당하고 있다.
삼양식품(003230) 그룹의 전병우 상무는 창업주 고(故) 전중윤 명예회장의 손자이자 전인장 회장과 김정수 부회장의 아들이다. 삼양라운드스퀘어 전략기획본부장 겸 글로벌전략본부장을 맡고 있다. 신규 브랜드 '맵탱' 기획에 참여해 제품군을 확장하고 있다. 삼양식품의 대표 브랜드 '불닭'으로 구축된 해외 인프라를 기반으로 단백질·헬스케어 신사업을 추진하는 등 글로벌 식품기업으로서 체질 전환에 힘쓰고 있다.
담철곤 오리온(271560)그룹 회장의 장남인 담서원 경영관리 담당(경영지원팀) 전무는 그룹의 경영지원·글로벌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중국·베트남 등 해외 법인의 실적 회복과 북미 시장 재진입을 지원하고, 전사적 관리시스템(ERP)을 구축하는 등 경영 효율화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오뚜기(007310)의 함윤식 부장은 함영준 회장의 장남이다. 올해 4월 경영관리부문 차장에서 마케팅실 부장으로 승진했다. 함 부장은 임원직을 맡고 있진 않다. 대신 브랜드 전략·글로벌 사업 실무를 맡아 장기적으로 오뚜기의 글로벌 사업 확대를 위한 경험치를 쌓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녀 함연지씨는 오뚜기 아메리카에서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다. 함씨의 남편 김재우씨도 같은 법인에서 근무 중이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장남인 이선호 CJ그룹 미래기획실장은 그룹의 장기 전략과 글로벌 투자 포트폴리오를 총괄하고 있다. 특히 K(케이)푸드·K콘텐츠·바이오 등 CJ그룹의 핵심 계열사 간 시너지 효과가 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외에 빙그레(005180) 3세인 김동환 사장은 브랜드 중심으로 사업 전략을 전환해 프리미엄 제품군 확대와 디자인·스토리텔링·마케팅을 통합하는 브랜딩 경영을 추진하고 있다. 동서(026960) 3세인 김종희 부사장은 그룹 전략본부를 총괄하면서 캡슐커피 등 신사업 구조를 다각화하는 중이다.
이처럼 주요 식품사 오너가 3·4세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게 된 배경은 식품업계의 '생존 해법'과 맞닿아 있다. 더 이상 '아버지 세대'가 중시했던 제조 효율과 내수시장 방어가 통하지 않는 탓이다. 특히 디지털 전환과 해외 시장 공략이 핵심 전략으로 꼽히는 상황에서 대다수가 해외 대학·MBA 출신인 이들의 글로벌 경험이 아버지 세대의 경영 방식이 놓치는 부분을 보완해줄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3·4세들은 제품보다 스토리를, 공장보다 브랜딩을 중시한다"며 "앞으로 K푸드를 단순 수출품이 아닌 문화 콘텐츠로 확장하려는 시도를 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다만 업계 일각에서는 이들 대다수가 경영 능력 검증보다 '오너 일가'라는 이유로 주요 보직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혈연 중심 승계 구조의 반복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젊은 감각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앞세운 3·4세 경영인의 등장은 글로벌 시대에 분명 강점이지만, 실제 경영 성과로 입증된 사례는 많지 않다"며 "젊은 경영인이 전면에 나섰다고 해도 가족 중심 네트워크에서 의사 결정이 이뤄진다면 기업 문화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젊은 리더십이 시장의 신뢰를 얻으려면 투명한 의사 결정과 책임 경영 체계를 제도화하고 외부 검증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