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생활건강(051900)의 올해 2분기 화장품 부문은 163억원 영업손실을 기록했습니다. 2004년 이후 약 20년 만입니다. 화장품 대장주 자리에서도 밀려났습니다. 쌍두마차로 꼽혔던 아모레퍼시픽(090430)에 자리를 내준 것은 물론이고, 신생 뷰티테크 기업인 에이피알(278470)보다도 시가총액이 적어졌습니다. 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전날 종가 기준 화장품주 중 시가총액 1위 기업은 에이피알(약 7조9000억원), 2위 기업은 아모레퍼시픽(약 7조5000억원)이었습니다. LG생활건강의 시가총액(약 4조6000억원)과는 3조원쯤 차이가 납니다.
증권가에서는 LG생활건강의 목표주가를 낮추고 있습니다. 대신증권은 34만원에서 29만원으로, NH투자증권은 34만원에서 27만원으로 목표주가를 낮췄습니다. 2021년 7월 LG생활건강 주가가 178만원에 육박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격세지감입니다.
프리미엄 화장품 브랜드 '더 후(THE WHOO)'로 중국 소비자를 사로잡고, 황제주 소리를 듣던 LG생활건강이 어쩌다 이렇게 부진한 상황이 됐을까요. 중국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고 면세점 유통에만 집중했던 것이 문제였다는 지적은 많이 나왔지만, 이제는 조직 내부적인 문제도 같이 따져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최근 LG생활건강 화장품 부문 부진 이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큰 나무 아래에서는 큰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라는 말이 자주 인용됩니다. 큰 나무의 그늘에 가려진 작은 나무들이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해 잘 자라지 못하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것입니다. 이는 조직에 적용되기도 합니다. 조직 내에서 권력이나 영향력이 큰 사람이나 집단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 그늘에 가려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LG생활건강에는 입지전적인 인물이 있었습니다. 2005년부터 2022년까지 LG생활건강을 이끈 차석용 전 대표입니다. LG생활건강의 도약을 끌어낸 주인공으로 불립니다. 그가 코카콜라음료, 더페이스샵, 해태음료, 에버라이프 등을 차례로 인수하며 LG생활건강의 외형 확장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2004년 매출 1조원이었던 LG생활건강은 2021년 매출 8조원, 영업이익 1조원을 기록했습니다.
문제는 LG생활건강 조직이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임원을 키우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차 전 대표의 결정대로 하면 자본시장 반응도 좋았다. 그러다 보니 화장품 용기부터 제형까지 그의 의사를 확인하고 그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에만 골몰하게 됐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는 "어느새 조직의 허리 역할을 하는 연차가 됐는데 스스로 사업적 결정을 하는 방법은 잊었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습니다.
LG생활건강이 최근 아모레퍼시픽보다 더 사정이 안 좋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아모레퍼시픽은 시장 변화를 뒤늦게나마 읽고 과감한 경영 판단을 내렸지만, LG생활건강은 그러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아모레퍼시픽은 2023년 업황이 악화한 면세점 매출을 의도적으로 절반 가까이 감축했습니다. 작년엔 3800억원까지 줄였습니다. 반면 LG생활건강은 작년까지도 면세점 매출 6000억원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중국에서의 움직임도 비슷합니다. 아모레퍼시픽은 중국 사업이 꺾이자 2024년까지 중국 내 채널과 브랜드 수를 대폭 줄였습니다. 이에 따라 2024년 기준 중국 매출은 5100억원 수준으로 적어졌습니다. 반면 LG생활건강은 2024년까지 6900억원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박종대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LG생활건강은 중국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다른 지역에서 성장 동력을 찾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 점유율과 매출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왔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최근 LG생활건강 내부에는 과감한 투자 결정을 적기에 내리지 못한 것이 문제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습니다. 북미 시장 확대를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은 브랜드력이 약해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기 케이(K)뷰티 인디 브랜드 인수를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가격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과감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에 접어들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건 너무 오랜 기간 뛰어난 대표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라며 "훌륭한 누군가가 사업 결정을 내려주길 기다리는 문화에 젖어있는 건 아닌지 돌이켜봐야 할 시점"이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