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텐딩 대회라고 하면 병을 던지고 받는 화려한 기술만 떠올리기 쉽다. 지난 9일 '월드클래스 코리아 2025' 파이널 무대에 오른 박희만(31) 바텐더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라는 한 마디로 무대를 시작하더니, 심사위원들을 자신이 서 있는 곳 가까이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쑥, 도라지 등 그가 준비한 재료를 심사위원들이 직접 만져보고 냄새를 맡게 했다. '좋은 칵테일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그의 신념이 그대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박 바텐더는 우승을 차지했다.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칵테일바 '참제철'에서 만난 디아지오 '월드클래스 코리아 2025' 우승자 박희만 바텐더가 조선비즈와 인터뷰 전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장경식 기자

10분간의 짧은 퍼포먼스였지만 여기엔 그의 오랜 고민과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조선비즈는 지난 22일 그가 매니저로 근무하고 있는 서울 종로구 칵테일바 '참제철'에서 박 바텐더를 만났다. 그는 "심사위원들이 재료를 직접 경험해야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잘 전달될 것으로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심사위원들을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한 것은 바텐더로서 쇼맨십이라기보다는 칵테일 한 잔에 담은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전달하기 위한 시도였던 셈이다.

월드클래스 코리아는 글로벌 주류 회사 '디아지오'가 주최하는 국내 최고 권위의 바텐더 대회다. 올해 16회를 맞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ㅡ월드클래스 코리아 파이널에서 '커먼 그라운드(Common Ground)'라는 이름의 칵테일을 선보였다. 어떤 의미를 담았나.

"올해 파이널 주제 중 하나는 디아지오의 프리미엄 테킬라 '돈 훌리오 블랑코'를 활용해 하이볼 또는 팔로마를 제조하는 것이었다. 참가자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과 글로벌 결승이 열릴 캐나다의 식재료를 활용해야 했다. 내 고향은 경기 안양시인데 특산물이라고 부를 재료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한국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쑥과 도라지에서 영감을 받았다. 아울러 테킬라의 원료인 멕시코 아가베가 땅에 깊게 뿌리내리는 식물이라는 점에도 주목했다. 멕시코에서 아가베는 가족이 함께 기르고 수확하는 작물이다. 땅과 뿌리에 대한 경의, 공동체의 가치를 강조하고 싶었다."

ㅡ2021년부터 대회에 참가해 4전 5기 끝에 우승했다.

"첫 해에는 톱20에 들었는데 운이 좋았던 것 같다. 그 이후에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대회에 몇 차례 실패하면서 자괴감도 들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우승할 만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시야가 넓어지더라. 예전에는 '내가 뭘 보여줄 수 있을까', '어떻게 멋있게 보일까'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욕심을)내려놓고 대회에 임했더니 작년에는 준우승을 했다. 작년 결과에는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올해는 박희만이라는 바텐더가 누구인지, 나를 그대로 보여주자는 생각에 집중했던 것 같다."

ㅡ어떻게 바텐더를 하게 됐나.

"한국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하고 싱가포르의 한 호텔에서 근무했다. 직장 동료들과 함께 싱가포르의 어떤 바에 갔는데, 인생에서 처음으로 바 문화를 접한 게 이때였다. 바텐더 되고 싶어서 인터컨티넨탈 브랜드의 호텔 바로 이직했다."

ㅡ싱가포르의 바 문화는 어떤가.

"손님들이 술을 아주 빠르게, 많이 마신다. 싱가포르에는 정말 다양한 술이 있다. 향신료도 마찬가지다. 메뉴 하나하나에 콘셉트가 있는 점도 특징이다. 팜 투 바(farm to bar)라는 개념도 있다. 농장에서 자란 신선한 농산물을 사용한다는 의미다. 카카오 농장에 바텐더가 직접 방문해서 재료를 가져온 뒤 농장주 얼굴과 이름을 메뉴에 올리는 곳도 있다. 바텐더가 단순히 술만 만드는 직업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배웠다. 다양한 이야기와 정체성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픽=손민균

ㅡ한국은 싱가포르와 많이 다른 분위기일 것 같다.

"한국 바텐더들은 정말 섬세하다. 술 한잔을 두고 바텐더 여러 명이 모여 어떤 레시피가 좋을지 고민하더라. 처음에는 정말 낯설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기술을 더 배우고 가다듬을 수 있었다. 예컨대 작은 크기의 칵테일 쉐이커는 한국에서 처음 사용해 봤다. 싱가포르에선 술을 한 번에 빨리, 많이 만들어야 하는 분위기여서 늘 큰 크기의 쉐이커만 사용했다. 한국 바에서는 재료와 술의 특징에 따라 다른 쉐이커를 쓴다."

ㅡ그동안 다양한 경험을 쌓은 듯하다.

"싱가포르에선 '나를 놀라게 하는 칵테일을 만들어줘'라는 손님이 종종 있었다. 나는 그런 도전을 좋아했다. 다양한 술과 재료를 접하고 여러 가지 창의적인 칵테일을 만들었던 경험이 맛의 구조를 설계하는 근간이 됐다. 한국에 돌아와선 여러 바에서 경험을 쌓으며 훨씬 완성도 있는 칵테일을 만들게 됐다."

ㅡ좋은 칵테일은 어떤 것인가.

"손님들에게 늘 상상 이상의 칵테일을 만들어주고 싶다. 손님들에게 즐거운 경험을 주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좋은 칵테일이다. 우엉과 꿀, 화이트 와인을 활용해 메뉴를 만든 적이 있다. 대조적인 재료들이어서 손님들이 술을 곧바로 접하면 어렵게 느낄 수도 있다. 여기에 '봄비'라는 이름을 붙이고 비 오는 날 젖은 땅의 느낌이라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렇게 스토리텔링을 담으면 이해하기 쉬워진다. 칵테일은 어려운 게 아니다. 즐기면 좋겠다."

ㅡ오는 9월 캐나다에서 열리는 '월드클래스 글로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다. 각오는.

"한국 대회를 준비할 때와 마찬가지다. 박희만이라는 바텐더가 누구인지 증명하고 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전 세계에서 온 바텐더들에게 한국을 각인시킬 만큼 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