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만 해도 이 계곡에는150여 개 피스코 증류소가 있었습니다.지금은 겨우 15개만이 남았죠."
지난해 11월 24일, 칠레 중북부 엘키 밸리에서 40년째 피스코를 만들어온 올란도 첼메 장인이 아쉬움이 묻어 나는 말투로 말했다.
칠레 농림부에 따르면 1920년대 피스코 전성기에는 엘키 밸리와 리마리 밸리를 중심으로 총 280여 개 증류소가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산업화 물결과 1973년 쿠데타 이후 급격한 경제 자유화 정책으로 소규모 증류소들은 대거 문을 닫았다. 국내 전통 소주 제조업체들이 걸었던 길과 비슷하다.
"대량 생산 체제로의 전환 압박, 원재료 가격 상승, 그리고 젊은 세대의 기술 계승 포기가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칠레 코큄보 지역 피스코 전문가 클라우디아 로페스는 말했다.
현재 엘키 밸리와 리마리 밸리를 넘어 칠레 전역에서 피스코를 생산하는 양조장은 85곳 정도다. 이 중 연 매출 100만달러(약 15억원)를 넘는 곳은 10곳 정도다. 칠레 대기업들은 수익성을 이유로 피스코 시장 진출을 꺼린다. 주류업계에 따르면 피스코는 평균 영업이익률이 8% 수준이다. 30%에 달하는 맥주, 15~20%인 와인에 비하면 낮다.
"살아남은 증류소들은 오히려 이런 상황을 기회로 삼았습니다." 칠레주류산업협회 관계자가 말했다. "대량 생산을 하기보다, 장인정신과 전통을 강조하는 프리미엄 전략으로 전환한 거죠."
엘키 밸리 로스 니초스(Los Nichos)는 1868년 설립된 칠레 최고(最古) 증류소다. 가장 큰 특징은 200년이 넘은 구리 증류기와 자연 동굴에 마련한 대규모 저장고다.
"우리가 만드는 피스코는 스모키 패러독스(The Smoky Paradox)라 불리는 독특한 향미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루이스 데 라 하라 메리노 대표는 설명했다.
이 증류소는 증류 과정에서 참나무로 증류기를 가열하는 전통 방식을 고수해 짙은 훈연 향이 난다. 주류 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는 2023년 평가에서 "처음에는 강렬한 훈연 향이 코를 채우지만, 입안에서는 달콤한 포도 향이 피어나는 독특한 반전이 매력적"이라고 평했다.
연간 생산량은 12만 병에 불과하다. 수백만 병 이상 생산하는 칠레 대규모 와이너리에 비해 적은 양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이 브랜드 피스코 평균 판매 가격은 80달러를 넘는다.
반대로 리마리 밸리 카핀차스(Capel)는 여전히 규모를 중요시하는 생산자다. 카핀차스는 1938년 설립한 협동조합이다. 현재 1200여 포도 농가가 참여해 규모가 크다. 칠레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이 회사가 만드는 피스코는 연간 생산량 900만 리터에 달한다. 칠레 전체 피스코 생산량 25%를 차지한다.
카핀차스는 규모가 크지만, 단순히 생산량을 늘리기보다 지속가능 경영에 힘을 쏟는다. 2023년 기준 증류소 전체 전력 80%를 태양광으로 충당했다. 병을 감싸는 패키지도 친환경 방식으로 바꿔 연간 플라스틱 사용량을 50톤 이상 줄였다. 경제전문매체 포브스는 카핀차스를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주류 생산자'라고 평가했다.
와카(Wacar)는 과감한 도전으로 주목받는 신생 증류소다. 이 증류소는 설립 이후 '제로(0) 첨가 정책'을 실천하고 있다. 오로지 머스캣 단일 품종 포도만을 사용한다. 포도 품종을 하나만 사용하면, 해당 품종이 가진 단점을 숨길 수 없다. 대신 특정 품종이 갖춘 풍미를 온전하게 느낄 수 있다.
설립자 피스케로 히메네스는 "현대 소비자들은 순수하고 투명한 가치를 중요시한다"며 "피스코가 가진 본질을 가장 순수하고 과장없이 표현하는 것이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주류 전문매체 와인앤드스피릿은 2023년 이 브랜드를 전 세계 최고 증류주 10선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국제주류품평회 자료에 따르면, 와카는 지난해 미국 시장에서 2023년보다 45% 성장했다. 이 브랜드 간판 상품 와카 싱글 빈야드는 깔끔한 맛과 길게 이어지는 포도향 여운으로 유명하다. 이 브랜드는 미국 내 고급 바에서 칵테일 베이스로 인기를 얻고 있다.
국제증류주협회(International Spirits Association)는 2024 증류주 트렌드 리포트에서 "칠레 피스코는 전통과 혁신의 균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류주"라며 "수백 년 전통을 지키면서도 지속가능성과 투명성처럼 현대 소비자가 요구하는 요소에 맞춘 발전을 이뤄내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