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음식점 거리는 여느 때와 다르게 한산했다. '연말 특수'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불만 켜진 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음식점이 대부분이었다. 9시를 넘어가자, 골목 분위기는 을씨년스럽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황량했다. 시계가 10시 반 정도를 가리키니 한 테이블만 남은 식당도 보였다.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 사태 이후 여러 회식과 송년회 자리가 줄줄이 취소되면서 자영업자들이 기대했던 연말 특수가 사라지고 있다. 탄핵 정국이 예상보다 길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이 연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퍼지자 분주하고 활기찬 연말 분위기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광화문, 종로, 강남 같은 직장인 밀집 지역뿐 아니라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 음식점에도 비상계엄 이후 손님 발길이 뚝 끊겼다.
10일 조선비즈 취재에 따르면 용산 대통령실 인근 국방부 직원들이 자주 찾는 H 한우 전문점 직원은 "탄핵 정국에 연말 예약이 모조리 취소됐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2일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열린 민생토론회에서 "노쇼(no-show·예약 부도)' 피해가 연간 4조5000억원에 달한다"며 노쇼 근절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비상계엄을 발령하기 바로 전날이었다.
그러나 윤 대통령 스스로 탄핵 정국에 휘말리면서 오히려 노쇼를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비상계엄은 짧은 시간에 해제됐지만, 지난 4일부터 9일까지 광화문, 종로, 용산 등 주요 상권 상당수 가게는 직격탄을 맞았다.
특히 공공기관 주변 상권은 눈에 띄게 손님이 줄었다. 공공기관마다 진작 연말 회식 2차나 음주 운전을 하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계엄 사태까지 터지자 공공기관들은 부서 회식조차 알아서 취소하는 분위기다.
한국외식업중앙회 마포구지회 관계자는 "4일부터 지난 주말까지 받은 저녁 손님 수가 평소 하루치에도 못 미쳐서 매일 한 시간씩 일찍 마감하는 중"이라며 "코로나 때는 시간과 인원 제한은 있었어도 손님은 꾸준히 들어왔고 정부 지원금이라도 나왔다"고 말했다.
자영업자 커뮤니티 '아프니까 사장이다'에는 지난 주말 이후 "100여 명 규모 관공서 단체 예약이 한 번에 취소됐다", "대기업 명의로 예약한 건들도 예외 없이 취소 중", "어차피 손님도 없으니 그냥 문 닫고 집회에 나가야겠다" 같은 글이 올라왔다.
전문가들은 정치가 극도로 불안정한 국면에 접어들면 소비와 투자가 자연스럽게 위축된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 9일 펴낸 경제 동향 12월 보고서에서 "최근 우리 경제는 건설업을 중심으로 경기 개선세가 제약되는 가운데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특히 상품 소비에서 감소세가 이어져 내수 회복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다. 내수 부진 판단은 작년 12월부터 1년째 이어지고 있다.
한국은행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시국이었던 2017년 1월 발표한 '통화신용정책보고서'를 보면 "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 등을 살펴봤을 때 정치적 불확실성 확대는 서비스업, 설비투자, 민간 소비 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며 "3분기 이후에 그 영향이 점차 소멸한다"고 분석했다.
이전 사례를 보면 자영업자를 덮친 줄취소 공포가 내년 하반기 이후에나 잦아들 것이라는 뜻이다.
다만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5일 브리핑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우리 경제에 중장기적으로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내다봤다. 이 총재는 "과거 두 차례 경험을 봤을 때 이 정국이 길게 가더라도 정치적 프로세스와 경제적 프로세스는 분리될 수 있었다"고 평했다.
앞서 윤 대통령은 2일 민생 토론회에서 노쇼 방지 대책 외에도 영세 소상공인·자영업자 대상 배달 수수료 인하 같은 내용을 담은 자영업자·소상공인 지원 대책을 발표했다. 여기에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소상공인·자영업자를 위한 전용 예산으로 역대 최대 규모에 해당하는 5조9000억원을 편성하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정부 기능이 마비되면서 윤 대통령이 강조했던 소상공인 지원책은 힘이 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현재 경제정책을 진두지휘할 대통령실과 부처 수장들은 일괄 사표를 제출한 상태다.
서울 광화문 중심가에서 여러 음식점을 운영 중인 한 자영업자는 "당장 회식도 마음대로 못 하는 공무원들이 어떻게 역대 최대 규모 예산을 편성하고, 정책을 제대로 시행하겠다는 말인지 모르겠다"며 "웃고 떠들면서 술 한 잔 하는 일상에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