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가 전 세계 주류업계에서 차지하는 입지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오랫동안 외국인들은 케이(K)팝, K뷰티, K드라마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다음 한식(韓食)이 따라왔다. 대표 메뉴는 불고기와 비빔밥이었다. 먹는 음식에 술이 빠질 수 없다. 곧 소주와 맥주를 찾는 외국인이 늘었다.
이제 외국 일류 소믈리에나 바텐더도 한국에 오면 소맥부터 찾는다. 이들은 눈에 익숙하면서도, 혀에는 새로운 술에 열광한다. ‘드라마에서 봤어요’, ‘알아서, 좋을 대로 섞어 마시는 자유로움에 반했어요’하는 식이다. 여기에 소주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증류주라는 설명까지 곁들이면 반응은 더 격해진다.
전 세계에 소맥 열풍이 불어닥친 지 벌써 수년이 지났다. 요즘에는 전문화·세분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전처럼 외국인이라도 저렴한 희석식 소주만 찾지 않는다. 섞어 마시는 즐거움을 느낀 외국인들은 이제 잘 만든 소주 그 자체에 관심을 보인다. 2022년을 기점으로 이미 여러 증류식 소주가 쏟아지듯 등장했다. 이 가운데 옥석을 가르기는 쉽지 않다.
지난 8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안동소주 세계화’를 주제로 ‘제1회 안동 국제 증류주 포럼’이 열렸다. 명성 높은 소주 브랜드를 보유한 지자체와 주류 업계 전문가들이 K콘텐츠로 소주가 차지하는 영역과 위상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놓고 머리를 맞댔다. 이번 포럼은 사단법인 안동소주협회와 조선비즈가 주최·주관했다. 경상북도와 안동시, 한국증류협회는 후원으로 참여했다.
안동소주는 750년 전부터 양반가에서 직접 빚어 마시던 술이다. 역사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만드는 비법이 경북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국내 여러 증류주 가운데 가장 인지도가 높다.
안동소주를 중심으로 국제 행사가 열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포럼에는 세계 주류 흐름을 주도하는 업계·학계 전문가들과 양조 관계자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안동소주 품질을 높이고, 새로운 시장을 위한 브랜딩 방안을 두고 심도 있는 발표와 토론을 펼쳤다.
이철우 경상북도지사는 이날 개회사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제조업보다 먹고, 놀고, 즐기는 산업이 중요하다”며 “안동소주도 중국 마오타이(茅臺)처럼 삼성전자 주가를 뛰어넘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했다.
독일 주류 전문가 위르겐 다이벨 다이벨컨설턴트 대표는 안동소주 고급화에 주목했다. 다이벨 대표는 세계 최초 코냑 사무국(BNIC) 인증 교육자다. 3대 증류주 품평회로 꼽히는 스피릿 셀렉션 심사위원도 맡고 있다.
다이벨 대표는 세계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주류 통계 기관 IWSR 자료를 인용해 “지난해 글로벌 증류주 시장에서 핵심 금액대였던 30~100달러 사이 술은 매출이 줄었지만, 100달러(약 14만원)가 넘는 슈퍼 프리미엄 주류는 이전보다 많이 팔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이나 유럽 소비자들은 새로운 술이 입술에 처음 닿을 때 얼마나 새로운 경험을 하는지 여부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다.
유럽은 주요 주류 문화 원산지다. 위스키로 유명한 스코틀랜드, 코냑을 뽐내는 프랑스, 증류주와 와인을 섞어 셰리를 만든 스페인 등 유럽 국가들은 오래도록 전 세계 주류 흐름을 이끌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주류 시장이다. 2022년 기준 364조원을 기록했다. 10조원대인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36배 이상 크다.
그는 안동소주가 제조 과정에서 환경적인 측면을 고려하고,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해야 이들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했다.
현재 안동에는 진맥소주, 명인안동소주, 일엽편주, 민속주안동소주 같은 9개 업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안동소주를 만들어 판다. 이 가운데 해외 유명 와인이나 위스키 브랜드처럼 국제적인 유기농 인증이나 친환경 인증을 받은 곳은 없다. 이런 인증을 받으려면 주기적으로 해외에서 심사단을 불러야 한다. 소규모 생산자들에게 이 비용은 부담스러울 수 있다.
다이벨 대표는 “선진 시장은 지속가능성과 투명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안동소주처럼 소규모로, 장인정신을 가지고 만든 술이라면 어디서 원료를 공급받고, 어떻게 만드는지 세밀하게 설명해야 높은 가격을 소비자가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술이 그저 이전보다 더 많이 팔린다고 ‘한국 술이 세계화 됐다’ 정의할 수 없다. 와인이나 맥주는 그 맛과 향을 객관적으로 논하는 공식 언어가 존재한다. 다양한 맛을 외국인 소비자가 술상 위에서 표현하려면 증류주를 두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식 언어가 필요하다.
영어에는 ‘짜다’에 해당하는 형용사가 따로 없다. 대신 ‘소금 맛(salty)’이라고 표현한다. ‘맵다’도 표현할 말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혀가 ‘뜨겁다(hot)’는 의미를 빌려 쓴다.
반면 한국어에는 맛을 표현하는 형용사가 유난히 많다. 달다, 짜다, 쓰다, 시다, 맵다 같은 맛 기본을 나타내는 어휘 말고도 새콤하다, 시큼털털하다 같이 여러 뉘앙스를 표현하는 말이 다양하다.
이승주 세종대 호텔관광외식경영학부 교수는 전문가들과 증류식 소주에서 나는 향을 68가지 단어로 정리해 이날 선보였다. 주류업계에서는 이를 향미용어체계라 부른다.
이 교수는 “술맛과 향에 대한 과학적인 분류 체계를 만드는 작업이 곧 가치를 높이는 길”이라며 “술은 단순히 취하기 위해 마시지 않고 맛과 향을 즐기려는 목적도 있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느낀 감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정리할 수 있는 용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곡물향을 추려 생쌀, 쌀겨, 보리, 밀 같은 세부 항목을 만들었다. 과일에서는 레몬, 베리류, 사과, 바나나, 건포도 등을 뽑았다. 일반 소비자가 느끼기 어려운 미생물 관련향은 퀴퀴한 냄새, 흙향으로 쉽게 풀어 표현했다.
이런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는 증류식 소주 업계 풍토를 바꿔놓고 있다. 하지만 아직 증류식 소주가 전체 소주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여전히 1%를 밑돈다. 미국 같은 주요 주류시장에서는 존재감이 아직 미미하다.
미국 뉴욕에서 우리술 수입사를 운영하는 김경문 마스터 소믈리에는 “한국에서는 소주를 병째로 사서 한 번에 비우지만, 미국 소비자는 증류주를 잔 단위로 사 마신다”며 “소비자가 직접 섞어 마시기보다 전문 바텐더나 주류 전문가가 제조한 칵테일을 선호한다는 점을 고려한 세밀한 증류주 마케팅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동소주는 해외 시장에 속속 발을 들이고 있다. 안동소주 수출액은 2021년 2억원에서 올해 10월 기준 8억1000만원으로 증가했다. 미국(1억3000만원)과 호주(7000만원), 중국(2000만원)에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 주류 박람회 독일 프로바인 박람회에도 안동소주 홍보관이 열렸다.
특산주는 보통 그 술이 나는 지역 토착 음식과 가장 잘 맞는다. 안동을 위시한 경상북도 북부권은 수운잡방, 음식디미방 같은 원조 한식 요리책이 쓰여진 고장이다. 유교 문화가 향촌 사회에 정착하면서 의례와 손님 접대에 맞는 술과 음식 문화가 발달했다.
안동소주가 세계화에 성공하면 자연히 이 지역 음식, 해당 지역 관광 자원을 탐구하려는 시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경주 교동법주, 문경 호산춘, 영천 한국와인 같은 경상북도 지역 다른 술 역시 안동소주 뒤를 이어 세계로 향하길 기다리고 있다.
권기창 안동시장은 “안동소주는 꼭 안동 간고등어, 안동 문어와 함께 먹은 다음, 제비원 미륵불을 찾아가 기도를 드리는 게 정석”이라며 “안동소주 성공이 대한민국 증류주 전체 성공으로 이어질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