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불삼대(富不三代). 부자는 3대를 채 못 간다고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1대가 일군 성과를 3대까지 고스란히 지키기란 쉽지 않다. ‘부의 대물림’ 저자 제임스 휴즈는 1대가 재산을 형성하면 2대는 그걸 유지하고, 3대가 탕진한다고 했다.

예외는 있다. 2대와 3대가 공적을 망치는 대신, 반대로 이전보다 부흥시키는 경우다.

미국 켄터키를 대표하는 버번 위스키 브랜드 와일드 터키(wild turkey)를 이끄는 러셀 3대가 그 예다.

버번(bourbon) 위스키에서 버번은 지명에서 따왔다. 프랑스 절대왕정을 이끈 루이 14세 가문 부르봉(Bourbon)이 어원이다. 부르봉 왕조는 1775년 미국 독립전쟁을 도왔다. 미국 정부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버지니아 서부 광대한 지역에 부르봉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미국 역사와 줄곧 함께 한 만큼 이 지역에는 뼈대 굵은 가문이 몇 있다. 그 가운데 와일드 터키를 이끄는 러셀 3대는 버번 왕조(dynasty)로 통한다. 1대 지미 러셀과 2대 에디 러셀, 3대 브루스 러셀 경력을 모두 합치면 올해로 127년에 달한다. 위스키 종주국이라 하는 스코틀랜드에서도 3대가 같은 증류소에서 쭉 경력을 이어가는 경우는 전례가 없다.

지난 5월 23일, 미국 켄터키주 시내에서 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로렌스버그를 찾았다. 와일드 터키는 1869년 로렌스버그에 처음으로 증류소를 열었다. 올해는 증류소 한편에 방문객을 위한 대형 휴게시설을 새로 장만했다. 1대 지미 러셀은 1974년 와일드 터키에서 일을 시작했다. 올해는 지미가 이곳에서 위스키 인생을 시작한 지 꼭 70년 되는 해다.

“가족과 일하는 경험은 소중합니다.

저는 아빠와 할아버지와 정말 잘 지냅니다.

그들이 제가 이 업계에 있는 이유입니다.”
브루스 러셀, 러셀 가문 3대

방문객을 맞이하는 건물 1층에 들어서자 바로 지미가 보였다. 그는 1934년 생이다. 올해 만 90세인 몸을 이끌고 매일 방문객을 직접 맞이했다. 옆에는 아내 조레타가 함께 했다.

끝없이 쏟아지는 방문객들은 지미와 조레타 앞에 서서 정중하게 악수를 요청했다. 일부는 직접 산 와일드 터키 위스키병에 이름을 적어 달라고 했다. 버번 위스키 팬들은 그 앞에서 무릎 꿇고 눈 맞추기를 서슴지 않았다. 흡사 루이 14세를 알현하는 가신 같았다.

손자 브루스는 할아버지 지미를 바로 옆에서 부축했다.

“할아버지 인생에서 위스키를 만드는 일보다 더 오래 한 일은 단 한 가지, 할머니와 결혼한 것뿐이다. 할머니와 결혼하고 6개월 후에 바로 와일드 터키 일을 시작했다. 지금도 두 분은 매일 이렇게 직접 사람들을 맞이한다.”

그래픽=정서희

그는 주류업계에서 버번의 부처(Buddha of Bourbon)로 통한다. 버번 위스키에 관한 질문이라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부처님처럼 현명한 대답을 내놓는다는 의미다. 지미는 와일드 터키 주요 브랜드를 창안하고, 출시했다. 지미가 만든 와일드 터키 101은 여전히 켄터키 버번 위스키를 상징하는 제품이다.

그는 아들과 손자에게 본인이 터득한 지름길을 가르쳐 주진 않았다. 반대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강조했다.

2대 에디 러셀은 “아버지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가르치기보다 궁금한 점이 있어 물어보면 ‘네가 직접 해봐’라고 하며 항상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해줬다”며 “가업을 이어받는다고 그 어떤 특혜도 주지 않았고, 반대로 더 혹독하게 조련했다”고 말했다.

아들 에디 러셀은 1981년 와일드 터키에 합류했다. 전설의 아들이지만 특혜는 없었다. 다른 직원과 똑같이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40년이 넘게 아버지 증류소에서 일하고 나서야 마스터 디스틸러(증류책임자·위스키의 맛을 결정하는 사람) 자리를 물려받았다.

에디는 아버지 지미와 다른 위스키를 좋아했다. 그는 아버지가 만든 주요 제품을 그대로 두고, 대신 본인 취향에 맞춘 새 브랜드 러셀 리저브(Russell’s Reserve)를 선보였다.

에디는 “러셀 리저브는 일반 와일드 터키보다 나무통에서 숙성한 느낌이 더 강하다”며 “둘 다 같은 숙성고에서 묵힌 원액을 사용하지만, 러셀 리저브에는 조금 더 오래된 원액 혹은 숙성고 중간층과 고층에서 묵힌 원액을 섞는다”고 말했다.

같은 숙성고라도 몇 층에서 묵혔는지 여부에 따라 원액이 뿜는 풍미는 크게 달라진다. 천장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나무통은 물 증발량이 많아 상대적으로 다른 층보다 알코올 도수가 높고 목 넘김이 강렬한 위스키를 품는다. 저층 나무통은 알코올 도수는 상대적으로 낮지만, 천천히 숙성해 균형감이 좋은 편이다.

부자(父子)는 켄터키 자연이 주는 이 미묘한 차이를 이용해 같은 원액으로 개성이 다른 위스키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은 버번 위스키 업계를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켄터키 버번 명예의 전당에 함께 올랐다. 부자가 동반 등재한 첫 사례다.

손자 브루스는 와일드 터키가 여전히 ‘너 자신을 믿어라(Trust your spirit)’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다고 말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이런 위스키를 만들어야 한다거나 좋은 위스키란 이런 거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본인이 생각하기에 자랑스럽고, 스스로 정말 좋아하는 제품을 만들라고 한다.”

와일드 터키는 최근 이들 3대가 한 팀으로 뭉쳐 만든 위스키를 선보였다. 지난달 국내에 한정 출시한 와일드 터키 제너레이션즈(Generations)다. 이 위스키는 3대가 각자 9년, 12년, 14년 그리고 15년 숙성 버번 나무통을 직접 골라 만들었다. 3대가 공식적으로 본인들 이름을 같은 병에 새겨 넣은 첫 위스키다.

에디와 브루스에게 좋은 위스키에 대한 정의를 묻자 그들은 위스키를 사람에 견줘 답했다. 버번 위스키 역시 표기한 숙성 연수가 길수록 맛있냐고 물으니 “사람과 비슷하다.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깊어지고 연륜이 묻어나듯 위스키도 향이 짙어지고 맛이 풍부해진다”고 했다.

그러나 막연하게 오래 묵히는 일은 금물이라고 그들은 설명했다.

“위스키도 사람처럼 전성기가 있다. 너무 오래 숙성하면 나무통 풍미가 위스키 고유한 맛을 압도한다. 그 전성기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마스터 디스틸러(위스키의 맛을 결정하는 사람)가 할 일이다. 우리는 아버지가 담은 원액으로 아들에게 줄 위스키를 만드는 일, 과거를 통해 미래를 약속하는 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