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없는 고온과 폭우 같은 이상 기후에 유통업계가 속을 끓이고 있다.
올해 식품 물가에 가장 큰 위험 요인은 기후라는 말이 나온다. 이상 기후가 잦아질 경우 자연스럽게 작황 악화가 불가피하다. 흉작 혹은 어종 변화는 곧 농수산물 가격 폭등으로 이어진다. 이상 기후(climate)로 물가가 오르는 것(inflation)을 의미하는 기후플레이션(climateflation)이라는 단어는 이제 일상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5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올여름에도 때 이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폭염과 폭우로 인한 작황 악화 우려가 불거지고 있다. 지난달 폭염일수는 역대 최악 더위라고 알려졌던 2018년 6월을 넘어섰다. 이달도 다르지 않다. 전문가들은 올해 장마 기간이 평년보다 약간 짧지만, 오히려 비는 더 많이 내릴 것으로 보고 있다. 케이웨더 기상센터는 특히 중부지방에 평소보다 2배 가까이 많은 비가 내릴 것으로 예측했다.
폭염과 폭우는 농수산물 같은 신선식품을 다루는 유통업계에는 적(敵)이다. 폭염에 폭우가 겹치면 물량이 줄어들 뿐 아니라, 품질도 고르지 못하다. 물류와 유통 과정에서 전염성 세균 감염에 대한 우려도 커진다.
◇ 金사과·金배 이어 수산물, 수입식품 가격까지 껑충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농산물유통정보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상(上)품 등급 후지 사과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3만4185원으로 1개월 전 3만2392원보다 1800원이 올랐다. 지난해 같은 기간 가격 2만5578원에 비교하면 9000원 가까이 뛰었다.
배 소매 가격 역시 신고 품종 기준 10개 6만7600원으로 한 달 전 5만3036원보다 27%가 올랐다. 1년 전(2만8486원)에 비하면 137% 급등했다.
사과와 배 가격은 앞으로 더 오를 가능성이 크다. 봄철 이상기후로 개화 시기가 앞당겨졌는데, 꽃이 핀 이후 기온이 급락하는 일이 겹치며 수확량이 줄어든 탓이다. 이 한번 줄어든 수확량은 여전히 예년 수준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농촌경제연구원은 이달부터 수확기까지 사과와 배 공급량이 작년 동기와 비교해 각각 21.3%, 87.1% 감소할 것으로 관측했다.
과일뿐이 아니다. 급격한 수온 상승으로 그동안 안정세였던 수산물 물가도 오르고 있다. 김밥용 김(중품), 건미역(상품), 갈치는 모두 5월 기준 작년 같은 때보다 13~77% 상승했다.
국립수산과학원은 올해 여름 우리 바다 수온이 과거 30년(1991~2020년) 평균보다 1도 내외 높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히 양식 어장이 대거 분포한 남부 지방 연안 해역은 평년보다 1.0~1.5도 안팎 표층 수온이 높게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 양식업은 수온에 맞춰 어종을 선택한다. 수온이 갑자기 오르면 양식업은 다시 예년 수온을 찾을 때까지 지속적인 피해를 본다.
그 밖에도 세계 곳곳이 이상기후로 몸살을 겪으면서 오렌지주스, 코코아, 올리브유, 커피 원두 같은 수입식품 가격마저 상승세다. 오렌지주스 농축액 선물(先物) 가격은 지난달 파운드당 5달러에 육박하며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국제 코코아 가격은 지난 10년 평균치 대비 4배가 올랐다. 국제 커피 원두 가격은 베트남과 브라질이 가뭄과 냉해를 겪으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 대형마트도 이상기후에 몸살... 기후플레이션 대응에 총력
물량을 대거 확보해야 하는 대형마트들은 비상이 걸렸다. 이들은 폭염이나 집중 호우에도 농수산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전사적인 대비책을 분주히 마련하고 있다.
이마트는 올여름 농작물 반사필름 타이벡 물량을 지난해보다 20∼30% 늘리기로 했다. 타이벡을 설치하면 과수가 햇빛을 골고루 받는다. 동시에 수분 흡수를 억제해 장마철에도 당도를 올릴 수 있다. 이마트는 장기 저장이 가능한 양파, 단호박, 감자 등의 작물을 사전 기획해 이달 초까지 자체 농산물 가공·유통센터에 저장 작업을 진행한다. 감자는 저장 시기를 전년보다 10일 앞당겼다. 파프리카 역시 7일분 물량을 사전에 확보했다. 수해를 입기 쉬운 수박은 100톤(t) 이상 물량을 비축했다.
롯데마트는 폭염과 장마로 신선식품 수급에 차질이 생길 것을 대비해 전국 권역별로 로컬 상품관리자(MD)를 배치해 운영하고 있다. 로컬 MD는 15년 이상 현장 경험이 있는 베테랑 직원으로 구성했다. 이들은 주요 산지 인근 지역에 거주하면서 단기간 급변하는 현지 상황에 발맞춰 대응이 가능하다고 롯데마트는 전했다. 롯데마트에 따르면 로컬 MD들은 매주 10곳 이상 농가와 협력사를 방문해 재배 상황 점검, 현장 지도, 대체 산지를 발굴하면서 선도 유지와 품질 관리에 힘쓰고 있다.
롯데마트 관계자는 “깻잎이나 상추 같은 잎채소는 햇빛 노출이 적고 온도가 낮은 새벽 5시부터 아침 7시에 수확해 시듦을 최대한 방지하고 있다”며 “새벽 수확을 마친 잎채소는 현장에서 오전 10시까지 포장을 마치고 오후 1시 전까지 점포에 직배송하는 식으로 관리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홈플러스는 수급에 차질이 없도록 대체 산지를 개발하는 중이다. 주로 오이와 애호박, 파프리카, 양배추, 브로콜리, 상추처럼 소비자가 많이 찾는 상품을 여러 산지에서 공급받고 있다. 샤인머스캣처럼 당도가 중요한 과일은 장마철 습기를 막는 전용 시설에서 재배한다. 복숭아는 자체 당도 검증 절차를 거쳐 통과한 상품을 투명한 포장으로 감싸 소비자가 신선도와 숙성 정도를 직접 보고 살 수 있도록 했다.
◇ 이상기후, 생활물가에 직결... 물가 정책 상수로 취급해야
식품업계 일각에서는 정부 역시 기후플레이션 문제를 중장기적으로 보고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이상기후가 실생활에 강도 높게 영향을 미치는 만큼, 이제 물가 정책을 꾸려나가는 과정에서도 기본적인 상수로 포함해야 한다는 의미다.
지난달 한국은행 물가연구팀 조병수 차장과 민초희 조사역이 발표한 ‘기후변화가 국내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월중 평균 기온이 해당 월 30년 장기 평균(1973~2023년) 기온보다 1도 높은 상태가 1년간 이어진다고 가정하면, 1년 후 농산물 가격은 2% 오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시에 전체 소비자물가 수준 역시 0.7% 높아졌다.
폭염 같은 일시적이고 강도 높은 이상기후 역시 농산물을 포함한 식품 물가에 위협적이다. 기상청이 국내 기후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월 평균 기온이 예년 평균 기온에 비해 1도 이상 갑자기 오르면, 그달 농산물 가격 상승률은 0.4~0.5%포인트가 바로 뛰었다. 그 영향은 6개월 정도 이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상청은 온난화로 기온이 상승하면서 여름이 길어진 현실을 반영해 우리나라 계절별 구간을 손보는 작업에 착수했다. 현재 보편적으로 여름은 6월부터 8월까지 3개월을 뜻한다. 그러나 기상청은 극단적 폭염·폭우가 발생하는 혹독한 여름이 길어지는 현실을 고려해 계절별 길이 전반을 다시 설정할 예정이다.
장지혜 DS투자증권 식음료 부문 연구원은 “올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이른 폭염이 시작했고, 특히 올여름은 고온 현상과 높은 습도로 예년보다 더 힘들 전망”이라며 “국내외에서 이상기후 현상이 잦아지면서 농수산업은 물론 실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