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업계가 한번 오르면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던 주요 제품 판매 가격을 올해 들어 이례적으로 낮추고 있다. 물가 안정을 강조하는 정부 정책 기조에 동참한다는 취지다.
다만 일각에서는 관련 부처 장차관이 직접 기업을 찾아 가격 인하를 요구하면 어떻게 가격을 낮추지 않을 수 있겠냐며 정부가 과도하게 시장에 개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3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CJ제일제당(097950), 삼양사(145990), 대한제당(001790) 같은 국내 주요 제당사들은 이달 1일부터 원재료 가격 하락을 반영해 기업 간 거래(B2B)에 공급하는 설탕 제품 가격을 약 4% 내렸다.
설탕 원재료에 해당하는 원당 국제 거래가는 지난 2022년 6월 1톤당 424달러에서 지난해 11월 602달러로 42% 올랐다. 이후 점차 하락해 이달 다시 2년 전과 비슷한 420달러 선으로 떨어졌다.
국내 설탕 소비 시장에서 기업 간 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은 90%에 달한다. 외식업계뿐 아니라 빵과 과자, 아이스크림, 초콜릿 같은 식품 전반에 설탕은 두루 쓰인다. 제당사가 B2B(기업 간 거래) 설탕 가격을 인하하면, 가공식품 물가 안정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정부는 이 점을 들어 올해 초부터 꾸준히 제당사를 포함한 식품업계에 강력하게 가격 인하를 권고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3월 서울 서초구 농협하나로마트 양재점을 방문한 자리에서 “과도한 가격 인상 담합 등 시장 교란 행위와 불공정 행위에 엄정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그 바로 다음 날 공정거래위원회는 CJ제일제당, 삼양사, 대한제당 등에 조사관을 보내 현장 조사를 진행했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역시 지난달 25일 대한제당 공장을 직접 찾아 “원당 국제 가격 하락분이 국내 제품 가격에 반영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했다.
물가 안정을 위한 전방위 압박에 오뚜기(007310)는 4월부터 식용유 가격을 5% 내렸다. 이 역시 3월 송미령 장관이 경기도 평택시 오뚜기 포승공장을 찾아 식용유 등 유지류 생산 현장을 직접 살핀 직후 나온 조치다.
밀가루 가격 역시 지난 4월부터 최대 10% 가까이 인하했다. CJ제일제당은 4월부터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밀가루 제품 가격을 제품에 따라 3.2~10%, 평균 6.6% 정도 낮췄다. 인하 대상에 들어간 부침용 밀가루와 중력 밀가루는 일반 가정에서 많이 사용하는 제품이다. CJ제일제당이 취급하는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B2C) 물량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 밖에도 동원F&B(049770)는 지난 1~2월부터 수산물 가공품 등을 9%에서 32%까지 조정했다.
식품업계는 강도 높은 물가 관리 정책에 동참하지만, 여전히 원가 부담이 상당하다며 난색을 보였다. 이들은 식품 생산 과정에서 원재료 가격이 내려가더라도 인건비, 유류비, 물류비 같은 제반 비용이 크게 뛰고 있다고 주장했다.
식품업계는 여전히 다른 산업보다 이윤이 적은 편이다. 지난해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기준 매출 10위권 내 식품기업 평균 영업이익률은 3.33% 정도였다. 1000원을 벌면 이익이 33원이었다는 뜻이다.
영업이익률이 5%를 넘은 곳은 해외 사업이 강세를 보이는 오리온(271560)(16.9%)과 오뚜기(7.4%), 농심(6.2%) 정도였다.
설탕과 밀가루 가격을 낮춘 CJ제일제당은 영업이익률 4.9%, 수산물 가공품 가격을 인하한 동원F&B는 영업이익률 3.8%를 기록했다.
하준경 한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기업에 과도하게 가격을 낮추라고 압박하면 슈링크플레이션이나 제품 품질 저하, 혹은 일정 기간이 지난 후 급격하게 가격이 뛰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슈링크플레이션은 양을 줄이는 슈링크(shrink)와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 합성어다. 제품 가격은 그대로 두는 대신 용량이나 크기를 줄여 가격을 올리는 효과를 거두는 행위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