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122년 양조장 역사를 자랑하는 회곡양조장은 안동소주를 생산하는 안동시내 9개 양조장 중 하나다. 그러나, 여느 양조장들과는 다르게 ‘숙성’에 진심인 양조장이다. 회곡양조장의 시그니쳐(대표) 제품인 ‘월영 안동소주(알코올 도수 43도)’는 목넘김이 부드럽고, 꽃향, 과일향이 은은하게 느껴지는데, 이는 3년간 숙성탱크를 10개나 바꿔가며 증류원액을 숙성시킨 덕분이다. 지금껏 국내 200여군데 양조장들을 돌아봤지만 회곡양조장만큼 숙성탱크를 옮겨가며 숙성에 많은 공을 들이는 곳은 보지 못했다.

1902년 주막으로 시작해, 막걸리 위주의 술을 생산해오던 회곡양조장이 증류식소주 생산에 주력한 것은 4대인 권용복 현 대표가 경영을 맡으면서부터다. 회곡양조장이 본격적으로 소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2014년 양조장을 지금의 안동시 풍산읍 산업단지길 5길 39로 이전한 것이 계기가 됐다.

회곡양조장 권용복 대표가 자사 주력제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왼쪽에서 네번째 22도 담소는 중국, 베트남에 이어 유럽, 브라질까지 수출이 이어지고 있다. /박순욱 기자

회곡양조장은 마을 이름에서 따왔다. 지금은 양조장을 풍산 농공단지로 이전했지만, 1920년대 양조장이 있던 마을 이름이 회곡(회화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양조장을 회곡양조장이라 지었다. 1902년 조부가 시작한 주막이 1925년 정식 양조장으로 설립됐고, 1937년에 2대 부친이, 그리고 1975년에는 모친 김숙자 여사가 양조장을 물려받았다. 지금의 권용복 대표가 모친으로부터 양조장을 물려받은 것은 2005년,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회곡양조장은 역사는 국내 어느 양조장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오래됐지만, 700년 안동소주의 전통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신제품을 내놓고 있어 벤처기업같은 역동성이 느껴지는 양조장이다. 다른 안동소주 양조장들이 대부분 전통을 앞세워 ‘소주의 원조’라는 안동소주 제조법을 보존, 계승하는데만 힘을 쏟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보면 회곡양조장은 ‘별종’이 아닐 수 없다. 명인 안동소주, 민속주 안동소주 등 식품명인 혹은 국가 무형문화재가 만든 유명 안동소주에 가려 회곡양조장이 만든 안동소주는 아직 전통주시장에서 차지하는 존재감은 매우 약하다. 그러나, 회곡양조장이 만든 안동소주를 맛본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기존 안동소주와는 확연히 다르게 목넘김이 부드럽다”고 놀라워한다.

지난 6월 22일 서울 방배동 한국가양주연구소에서도 회곡양조장이 만든 월영 안동소주의 진가가 십분 발휘됐다. 이날은 증류주제조마스터 과정 교육생(21기)들이 석달 간의 수업을 마치고 수료식을 거행한 날이었다. 가양주연구소 모든 과정의 졸업식은 교육생들 각자가 가져온 다양한 술들(직접 만든 술 포함)을 맛보고 거침없는 술 품평을 하는 게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 이날도 30여종의 술들이 시음대에 올랐고, 그중 하나가 회곡양조장의 월영 안동소주(알코올 도수 43도)였다. ‘증류주 전문가’를 자칭하는 까칠한 교육생들이 내놓은 월영 안동소주 시음평을 보자.

회곡양조장의 주력 상품들. 왼쪽부터 회곡생동동주, 회곡생막걸리, 안동 국화주, 담소, 월영 안동소주, 1902 안동소주. /박순욱 기자

“단향이 느껴지고, 목넘김이 좋다. 상압증류한 것 같은데도 탄내가 느껴지지 않는다. 숙성의 장점을 잘 살린 소주다.”, “오크통 숙성 위스키가 아닌데도, 카라멜향이 올라온다. 반면에 알코올 향은 뱃속에서부터 천천히 느껴진다.”, “부드럽다. 굉장히 맛있다. 내가 알던 안동소주와는 완전 딴판이다.”

물론 칭찬 일색인 것은 아니었다. 한국가양주연구소 류인수 소장의 평은 약간 드라이하다. 하지만 친절하게도 개선책까지 제시한다. “목넘김이 부드러운 것은 기존 안동소주에 비해 큰 장점이지만, 쓴맛이 살짝 느껴진다. 증류 과정에서 본류를 약간 덜 받으면 훨씬 좋은 술이 될 듯하다. 가령, 지금까지는 술덧의 30%를 본류로 받았다면 이를 좀 줄여 20%만 받으면 더 좋은 소주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통주 홍보 플랫폼 대동여주도의 이지민 대표 시음평도 엄청 호의적이다.

“컬러, 향, 맛, 전체적인 완성도가 기대치를 상회한다. 잔에서 보여지는 관능적인 레그(술이 잔에서 천천히 흘러내리는 현상)와 함께 꽃과 과실 등의 풍성한 향이 느껴지며, 맛에서는 진한 농축미와 감칠 맛, 긴 여운을 선사한다.”

극찬에 가까운 이같은 시음평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도대체 월영 안동소주는 어떻게 만들길래 이처럼 찬사가 쏟아지는걸까? 비밀은 숙성에 있었다. 3년의 숙성. 기존 안동소주는 물론 국내 수많은 증류식소주 중 3년을 제대로 숙성한 제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숙성은 곧 시간이고, 시간은 돈이다. 증류주를 숙성하면, 알코올 도수가 약간 낮아질 뿐 아니라, 술 일부가 휘발돼 날아가 양도 줄어든다.(오크통에서 숙성하는 과정에서 줄어드는 위스키를 ‘천사의 몫’이라고 말하지만, 항아리, 스테인레스 탱크에서 숙성하는 경우에도 일정량의 술이 날아간다.) 그러니, 양조장 입장에서는 가급적 숙성기간을 짧게 가져가야 자금 회수도 빠르고 술의 결감도 줄어드는 이점이 있다. 화요를 시작으로,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감압증류방식의 증류주들은 숙성기간이 6개월 미만으로 짧다.

회곡양조장 권용복 대표가 발효 중인 막걸리를 젓고 있다. 쌀, 물, 그리고 발효제가 고루 섞여 발효가 잘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박순욱 기자

그러나, 숙성을 거쳐야 비로서 상품성이 보장되는 증류주들이 많다. 위스키, 고량주 등은 높은 온도에서 알코올을 뽑아내는 상압증류방식을 채택, 다양한 풍미가 장점인 반면, 증류원액 맛이 거칠다는 단점이 있다. 월영 안동소주 역시 상압으로 내린 증류주다. 그래서 이런 술들이 갖고 있는 거친 향들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장기숙성을 거친다. 물론 숙성을 오래 할수록 증류원액은 해마다 2~3%씩 줄어든다. 고급 위스키 가격이 숙성연도에 비례해 비싼 연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회곡양조장 역시 월영 안동소주와 1902 안동소주를 제외한 소주들은 감압증류방식으로 만든다. 담소, 안동 국화주 등은 감압이다.

숙성은 거친 증류원액을 부드럽게 해주는 마법이다. 특히, 높은 온도에서 증류원액을 뽑아내는 상압증류방식의 경우, 몸에 좋지 않은 푸르푸랄같은 고비점 물질(높은 온도에서 기체화되는 물질)들이 많다. 그래서, 증류 직후의 원액을 맛보면 너무 거칠어 마시기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부득이 숙성을 거쳐 독성 있는 물질들을 제거해나간다.

이와 관련해, 국립한국농수산대학교 최한석 교수(농수산가공 전공)의 숙성 정의는 명쾌하다. “숙성은 한마디로 ‘가스 빼기’다. 열을 가하는 증류과정은 탄내 같은 이취와 숙취의 원인인 아세트알데히드, 그리고 황화수소 같은 역겨운 물질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숙성은 이같은 물질을 없애는 효과가 있다. 적어도 6개월은 숙성해야 하는데, 숙성과정에 증류원액이 공기와 접촉하는 과정(에어레이션)을 거치면 숙성의 효과는 배가된다.”

이런 점에서 증류주 숙성을 제대로 하고 있는 양조장 중 한곳이 바로 회곡양조장이다. 회곡양조장의 대표상품인 월영 안동소주는 숙성에만 3년을 보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같은 술을 일년에 네차례 정도 탱크를 바꿔가며 숙성한다는 사실이다. 3년이면 대략 10군데 정도 숙성탱크를 바꾼다. 한군데 탱크에서 오랫동안 숙성하다 보면 음용에 안좋은 이취들이 없어지기보다, 오히려 그 향이 더 진해질 수 있다고 여긴 때문이다. 그래서 회곡양조장의 권용복 대표는 숙성탱크를 일년에 네차례 정도 바꿔가며 증류원액을 장기숙성한다. 숙성 1년차에는 6개월 숙성 후 2개월간 냉동숙성을 하는데, 이는 백탁현상(알코올 도수가 낮아짐에 따라 맑은 증류원액이 뿌옇게 변하는 현상)을 없애기 위한 냉동여과를 거치기 위해서다. 그리고 나서도 2년 이상 더 숙성을 거친 후에야 병입해서, 세상에 내보낸다.

안동소주를 제품화한 것은 현 권용복 대표가 처음이지만, 회곡양조장에서 소주를 빚은 시기는 훨씬 뒤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선 그 증거들이 양조장 한켠에 전시돼 있다. 도자기로 만든 소주고리 2개가 그것이다. 권 대표의 어머니 김숙자 여사가 사용한 증류장비라고 한다. 그러나, 권 대표의 모친이 소주고리보다 앞서 소주를 내린 증류장비는 부엌에 있는 가마솥이었다. 권 대표의 회고를 들어보자.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은데도, 유독 생각나는 것은 장에 가시거나 출타하실 때 장면이다. 아버지는 외출할 일이 있으면 몇시간 전에 어머니한테 ‘소주 좀 내려놔’고 하셨다. 그러면 어머니는 막걸리를 가마솥에 붓고는 술을 끓이셨다. 이 때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덮고 가끔씩 찬물을 부으셨다. 가마솥 안에는 그릇을 하나 넣으셨는데, 신기하게도 이 그릇 속에 소주가 모아지는게 아닌가. 이렇게 만든 소주를 어머니는 장에 가시는 아버지 손에 들려 주셨다.”

‘어린’ 권용복은 당연히 몰라겠지만 이 장비는 고려말 원나라를 통해 소주가 전해지던 초기에 사용했던 증류장비 ‘는지’였다. 소주고리의 초기 형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뒤집어 덮은 가마솥 뚜껑은 냉각수를 붓는 냉각탱크 역할이다. 개량화된 소주고리가 생겨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기자가 찾아간 회곡양조장은 숙성탱크들이 즐비했다. 양조장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곳도 숙성실이었다. 탱크를 바꿔가며 숙성을 하는 이유가 가장 궁금했다.

“한곳에서 장기숙성하지 않고, 탱크를 옮겨가며 소주를 숙성하는 이유는, 탱크를 옮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새 공기와 접촉을 하기 때문에 술이 갖고 있는 독성, 이취들을 제거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술을 자주 옮김에 따라 물 분자와 술 알코올 분자 역시 화학적 결합이 가속화된다. 사용한 탱크는 다른 원액을 새로 붓기 전에 반드시 세척을 해서, 탱크 겉면에 묻어 있을지 모르는 지방질, 단백질 같은 이물질을 최대한 제거한다. 그리고 숙성 원액도 다른 탱크로 옮길 때마다 여과를 꼭 거친다. 숙성에 목을 매다 보니, 돈이 생길 때마다 숙성탱크를 사모으는 바람에 양조장 수익은 좋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과 정성을 들여 안동소주를 만든 덕분에 요즘엔 미얀마, 중국은 물론 독일, 벨기에 같은 유럽에서도 수출상담이 끊어지지 않는다.”

회곡양조장 권용복 대표가 올 3월 독일 프로바인에 참가, 자사 부스에서 시음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박순욱 기자

권 대표의 발언에 숙성의 진심이 느껴진다. 그러나, 권 대표라고 해서 처음부터 ‘숙성의 달인’은 아니었다. 장기숙성이 술을 부드럽게 해주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그 효과를 배가시킬 방법인 ‘숙성탱크 바꾸기’는 오랜 시행착오 끝에 터득한 노하우였다. 물론 관련기관의 도움도 받았다. 전북에 있는 한국식품연구원의 6개월 전문가 과정, 그것도 같은 과정을 세번 이수했다. 일주일에 한번, 경북 안동에서 전북 한식연 오가기를 1년 6개월이나 한 것이다. 같은 과정 교육을 세번이나 공부한 까닭을 권 대표는 이렇게 얘기했다. “증류주는 향과 맛이 이뤄지는 과정이 복잡하다. 발효단계에서부터 증류, 그리고 숙성에 이르기까지 효모, 효소의 성질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양조장 환경 조성 등 과학적인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때문에 다양한 증류주를 개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지속적 반복적인 공부와 연구가 필요했다.”

회곡양조장이 숙성을 다른 안동소주와 차별화 포인트로 삼은 것은 ‘안동소주 후발주자’였기 때문이다. 양조장 출발(1902년)은 주변의 안동소주보다 빨랐지만, 소주 빚기는 2014년에야 시작했다. 그래서, 아직은 회곡양조장 안동소주 제품을 세상에 내놓은지 얼마 안돼 매출은 그리 많지 않다. 여전히 회곡양조장의 매출 70%는 막걸리가 책임지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매출 70% 이상을 소주가 차지할 것으로 권 대표는 장담한다.

회곡양조장 권용복 대표(왼쪽 세번째)가 브라질 주류박람회에 참가, 수출 상담을 하고 있다. /회곡양조장

“지속적으로 수출이 이뤄지고 있는 양조장은 안동시내에서 저희 회곡양조장뿐입니다. 지난 3월, 독일에서 열린 프로바인 주류박람회에서도 벨기에, 독일에서 수출상담이 성사돼, 현재 수출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최근에는 브라질 주류박람회에도 참가해, 현지 대형마트와 수출을 협의 중에 있습니다. 안동소주의 세계화에 앞서, 세계인의 입맛에 맞는 술을 만드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숙성에 공을 들인 회곡양조장의 안동소주가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아, 안동소주 수출의 선봉에 설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회곡양조장이 또하나 여느 안동소주 양조장과 다른 점은 제품 개발이다. 43도 정통 안동소주인 ‘월영 안동소주’ 외에도 신제품이 즐비하다. 안동소주 제조업체(일엽편주 제외) 중 현재 막걸리와 약주를 만드는 곳도 회곡양조장 뿐이다. 그뿐 아니다. 증류주 종류도 많다. 국내산 쌀을 13분도 도정으로 잡미를 없앤 23도 소주 담소, 증류원액에 말린 국화를 침출시켜 만든 ‘안동 국화주’, 숙성 안동소주에 상황버섯을 침출한 ‘안동 상황주’도 내놓았다. 국화주 개발에만 3년이 걸렸다. 권 대표는 “색상과 맛이 위스키와 비슷한 상황주는 서양의 위스키에 견줄 만한 한국식 전통 고도주”라고 말했다.

2022년에는 창립 120주년을 맞아 8년 숙성한 안동소주 ‘1902′를 내놓기도 했다. 가격이 16만원대인 1902(알코올도수 45도)는 월영 안동소주보다 더 부드러우면서 묵직한 느낌이 특징이다. 회사 창립연도인 1902를 내세운 술로, 1902병 한정 생산된 제품이다. 약재를 침출한 새 제품도 출시를 준비 중이다.

회곡양조장 외부 전경. 1902년 창업, 안동시내 양조장 중 가장 역사가 깊다. /박순욱 기자

“700년 전에 안동소주가 처음 나왔을 때는 안동소주가 전통이 아닌, 획기적인 술로 대우받았을 겁니다. 그러다, 500년, 700년 지나면서 자연스레 전통이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제가 만드는 술이 100년, 200년 지나면 또다른 전통이 되지 않겠습니까? 과거의 전통만 붙들고 있지 말고,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나가는 게 지금 양조장을 경영하는 저희들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