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켄터키주 로렌스버그에 자리잡은 와일드 터키 비지터 센터. /유진우 기자

지난달 23일, 미국 켄터키주 시내에서 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로렌스버그를 찾았다. 이곳은 인구가 1만 명 남짓한 작은 마을이다.

버번 위스키 애호가들은 이곳을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위스키 성지(聖地) 가운데 한 곳으로 꼽는다. 여기서 만드는 버번 위스키는 미국인에게 영혼의 술로 불린다.

버번 위스키는 19세기 켄터키주 일대에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정착해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위스키는 언제나 버번이 차지했다.

미국에서는 위스키 대명사 스카치 위스키조차 인기가 버번 위스키만 못하다. 미국 증류주 협회(the Distilled Spirits Council of the U.S) 통계를 보면 매년 버번 위스키 소비량이 스카치 위스키보다 2배 가까이 더 많다.

버번 위스키 양조장은 로렌스버그를 중심으로 이 일대에 100여 개가 몰려있다. 그중에서도 와일드 터키(wild turkey)는 버번 위스키 교본으로 통한다. 여러 버번 브랜드 가운데 역사가 깊을 뿐 아니라, 전통 방식을 고수하면서 매년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을 내놓는다.

와일드 터키는 1869년 문을 열었다. 에릭 그레고리 켄터키양조자협회(KDA) 회장은 “유명 스카치 위스키 브랜드 발베니는 1893년 문을 열었고, 글렌피딕은 1887년 창립했다”며 “와일드 터키는 이들보다 오래 위스키를 만들어 온 브랜드”라고 말했다.

와일드 터키 위스키 증류소는 켄터키 강에서 채 100미터가 떨어지지 않은 언덕배기에 자리를 잡았다. 방문자를 맞이하는 건물에 들어서면 눈앞에 산과 작은 폭포, 계곡이 어우러져 있다.

브루스 러셀 와일드 터키 블렌더가 위스키 원액을 증류하는 증류공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유진우 기자

버번 위스키 재료는 옥수수와 보리, 호밀, 깨끗하고 부드러운 천연수, 효모가 전부다. 40~60%가 물이다. 와일드 터키는 증류소 바로 앞 켄터키강 물로 위스키를 만든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와일드 터키에서 일하는 브루스 러셀은 “같은 강을 끼고 있어도 지반 조건에 따라 미네랄이 녹아든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증류소마다 쓰는 물맛에 조금씩 차이가 난다”며 “여기에 곡물을 섞는 비율, 증류 방식과 숙성 햇수에 따라 맛과 향, 무게감과 개성이 다른 수천 가지 위스키가 탄생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와일드 터키에서 사용하는 옥수수와 보리는 주로 켄터키와 인근 인디애나주 남부, 일리노이주에서 가지고 온다”며 “품질 유지에 대한 전통적인 방식을 그대로 이어가는 차원에서 오래 거래한 주변 산지 곡물을 사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옥수수와 보리, 호밀은 잘게 부숴 당화 공장에서 60~70도로 끓인 물과 합쳐진다. 이후 발효조로 옮긴 곡물 즙은 효모(당분을 알코올과 탄산가스로 분해하는 미생물)를 섞어 사흘 동안 발효를 거친다.

한창 발효 중인 곡물 즙에서는 후끈한 맥주 냄새 같은 알코올 향이 진동했다. 살짝 맛을 보니 시큼한 식혜에 가까웠다. 이 즙을 구리 증류기가 있는 증류 공장에서 증류하면 알코올 도수가 62.5도인 투명한 위스키 원액이 탄생한다.

브루스 러셀 와일드 터키 블렌더가 발효 과정에서 핵심에 해당하는 효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진우 기자

위스키는 인고(忍苦)의 결정체다. 짧고 강한 목 넘김을 즐기려면 위스키 원액을 참나무통에 넣어둔 채 적게는 1~2년, 길게는 3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넓은 와일드 터키 증류소 한편에는 이 시간을 위한 7층 높이 숙성고 30여 채가 줄지어 서 있다. 보관 중인 참나무통은 110만 개가 넘는다.

숙성고는 160여 년 역사를 증명하듯 고풍스러움이 묻어났다. 브루스는 “오래된 켄터키 담배 저장 창고를 본떠 세운 숙성고”라며 “1894년 지은 숙성고를 지금도 쓰고 있다”고 했다.

숙성고 벽에는 까만 곰팡이 자국이 자욱했다. 위스키 증류소에서 오래된 곰팡이는 고마운 존재다. 술이 잘 익어 간다는 증거다. 이들은 이 곰팡이를 천사의 숨결(angel’s breath)이라 불렀다.

숙성고에 들어서자 향긋하면서도 묵직한 향이 코를 찔렀다. 익히 알려진 천사의 몫(앤젤스 쉐어·angel’s share)이 뿜어내는 향이다. 이 숙성고에서는 참나무통 안 위스키 원액이 매년 4% 남짓 자연 증발한다. 앤젤스 쉐어는 이렇게 증발한 술을 천사에게 나눠준다는 뜻이다.

7층 높이 숙성고 가운데 1층에서 숙성 중인 오크통. /유진우 기자

천사의 몫은 증류소에는 손실이다. 다른 브랜드는 이렇게 사라지는 술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고안했다. 일부는 숙성고 온도를 인위적으로 낮춘다. 추울수록 알코올 증발량은 줄어든다. 켄터키보다 평균 기온이 낮은 스코틀랜드에서는 천사의 몫이 2%로 절반 수준이다.

일부는 참나무통 배열을 수시로 바꾼다. 같은 숙성고라도 몇 층에서 묵혔는지 여부에 따라 참나무통 속 최종 결과물 풍미는 크게 달라진다. 와일드 터키 관계자는 “천장에서 가까울수록 열을 많이 받아 알코올 대신 물이 증발하는 양이 늘어나고, 지면과 가까운 아래층일수록 흙이 품은 냉기 때문에 물 증발량이 줄어든다”고 말했다.

그러나 와일드 터키는 숙성에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는다. 고층 오크통은 물 증발량이 많아 상대적으로 다른 층보다 알코올 도수가 높고 목 넘김이 강렬한 위스키를 품는다. 저층 오크통은 알코올 도수는 상대적으로 낮지만, 천천히 숙성해 균형감이 좋은 편이다.

브루스는 “이런 차이야말로 여러 제품에 개성을 살리는 중요한 요소”라며 “숙성고 온도를 조절하거나, 참나무통 배열을 바꾸면 여러 스타일 위스키를 만들 기회가 사라진다”고 말했다.

와일드 터키는 여러 버번 위스키 브랜드 중에서도 유난히 제품이 다양하다. 와일드 터키 101, 와일드 터키 레어 브리드 같은 대표적인 와일드 터키 라인업 10여 종에 마스터스 킵 시리즈와 제너레이션즈처럼 매년 프리미엄 제품군이 새로 나온다.

그래픽=정서희

여기에 브루스 아버지이자 와일드 터키 마스터 디스틸러(증류책임자·위스키의 맛을 결정하는 사람) 에디 러셀이 따로 만드는 러셀 리저브 라인업 10여 종을 선보였다. 에디는 1981년 이후 위스키를 만드는 모든 단계를 치밀하게 관리해 와일드 터키 맛과 향을 수십 년간 이어온 주인공이다.

브루스는 “아버지가 만드는 러셀 리저브 라인업은 숙성고 중간층 원액만 사용하는 반면, 스테디셀러 레어브리드는 7개 층 전체에서 나온 원액을 사용한다”며 “보통 10년이 넘은 오랜 원액은 창고 중간 4개 층에서 가져오고, 8년 정도 묵은 원액은 창고 중간층에서, 6년산 원액은 창고 윗부분에서 가져오는 식으로 위스키 풍미를 조절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와일드 터키는 여러 버번 브랜드 가운데 기준(standard)으로 통한다. 버번 위스키를 처음 즐기는 초보자부터, 버번 위스키 마니아까지 모두 섭렵할 만큼 다양한 제품을 두루 갖춘 덕분이다.

미국에서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저명한 위스키 평론가 마이클 피츠너는 “와일드 터키는 버번이 보여주는 훌륭한 표준”이라고 말했다.

이날 증류소를 함께 둘러본 영국 위스키 전문 작가 맷 챔버스는 “와일드 터키는 요즘 버번 위스키가 쓰지 않는,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브랜드”라고 했다.

그는 이어 “위스키 시장이 어려울 때 비용을 줄이기 위해 물을 많이 타고 여러 과정을 생략한 방식이 업계에 일반적인 방식으로 자리 잡았지만, 와일드 터키는 3대에 걸쳐 고전적인 유쾌함을 간직하고 있다”고 평했다.

더 큰 비용과 더 긴 시간이 들어가는 방식을 고수한 것이 오늘날 와일드 터키를 있게 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