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최남단 에트나 화산은 활화산이다. 수개월에 걸쳐 한번씩 분화한다.

가장 최근 기록은 석 달 전이다. 에트나 화산은 지난해 11월 25일 새벽부터 산꼭대기(해발 3326m) 분화구에서 화산재와 수증기를 내뿜었다. 눈이 쌓였던 산등성이는 시뻘건 용암이 흘러내렸다. 시커먼 연기는 한 겨울 주변 상공을 뒤덮었다. 인근 상공을 비행하는 항공기에는 우회하라는 경보가 울렸다. 이탈리아지진화산연구소(INGV)는 인근에서 이날 분화 이후 약 4시간에 걸쳐 120여 차례 지진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화산이 터지고 나면 분화구 주위에는 화산재가 쌓인다. 에트나 화산은 현재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 기록을 가지고 있다. 남동쪽 분화구 높이는 해발 3357m로 금강산보다 3배 가까이 높다.

에트나 화산이 자리잡은 시칠리아는 화산섬이다. 인근 부속 도서 모두가 화산활동으로 탄생했다. 이탈리아판 제주도다. 다만 면적은 제주도보다 13배 더 넓다. 이 섬 사람들은 지난 50만년 동안 화산과 함께 살았다. 에트나 화산은 1998년 이후 200번 넘게 분화했다. 이뿐 아니라 섬 북쪽에는 스트롬볼리 화산이 수시로 터지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화산은 때때로 인간에게 재앙을 불렀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멸망한 폼페이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시칠리아 사람들은 이 위험을 역으로 이용했다. 화산 인근 경사면은 짙은 화산회토(火山灰土)로 뒤덮여 있다. 50만년 동안 화산이 폭발할 때 분출한 4㎜ 이내 작은 입자가 촘촘히 쌓여 한 지층을 이뤘다. 화산회토는 토양 내 유기물 함량이 일반 퇴적층 평균보다 두 배 이상 높다. 한마디로 부들부들하고 비옥한 토양이 분화구 경사면에 두텁게 쌓여 있는 셈이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화산회토를 품질 좋은 와인을 만드는 기반으로 삼았다. 화산이 분출하는 시기에는 조용히 몸을 피했다가 화산재가 가시면 다시 포도밭을 일궜다. 겨우내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작업을 화산 분출 때마다 거듭했다. 그 결과 세계에서도 손꼽히게 활발한 에트나 화산 에너지를 그대로 와인 속에 넣은 와인들이 탄생했다.

그래픽=정서희

돈나푸가타(Donnafugata)는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와이너리 가운데 한 곳이다. 이 와이너리는 시칠리아 와인 고급화를 이끈 주역으로 꼽힌다.

돈나푸가타는 이탈리아어로 ‘도망치는 여인’이라는 뜻이다. 와이너리 로고에는 수심에 찬 여인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이 여인은 19세기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 왕비다. 그녀는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한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언니기도 하다.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는 동생이 처형되자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항했다. 하지만 상대는 나폴레옹이었다. 수세에 몰려 피난한 그녀는 시칠리아 돈나푸가타 포도밭 자리에 있던 저택에 한동안 머물렀다.

1851년부터 와인을 만들던 랄로(Rallo) 가문은 이 역사적인 건물을 사들여 1983년 돈나푸가타 와이너리를 세웠다. 이들은 이전까지 주로 저렴한 시칠리아 특산 주정강화와인을 만들었다. 건물 매입 이후부터는 전략을 바꿨다. 고급 와인 시장을 목표로 현대적인 와인 제조법을 도입했다. 차별화를 위해 마리아 카롤리나를 내세운 스토리텔링도 시작했다.

지금도 모든 돈나푸가타 와인 겉면에는 긴 머리를 풀어헤친 눈 감은 여자가 등장한다.

모두 이탈리아 화가 스테파노 비탈레(Stefano Vitale) 작품이다. 현재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5대 주인 안토니오 랄로는 “어머니 가브리엘라(Gabriella)가 먼저 와인을 맛보고 받은 영감을 색감과 이미지로 표현하면, 비탈레가 시칠리아 감성을 담아 디자인해준다”고 말했다.

와인을 시칠리아 전통적인 여성상으로 풀어내려는 시도는 음악으로 이어졌다. 안토니오 누나이자 공동 최고경영자(CEO) 호세(Josè) 랄로는 남편과 함께 2002년부터 돈나푸가타 와인과 음악을 연계한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호세는 직접 노래를 부르고 공연에 참여한다. 앞서 정규 앨범 세 장을 내고 미국 뉴욕,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 그리스 아테네에서 와인과 음악을 함께 즐기는 공연을 열었다.

돈나푸가타가 선보인 세라자데(Sherazade)는 아랍지방 설화를 모은 ‘아라비안 나이트’ 주인공이자 현명한 지혜로 왕에게 천일 동안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름다운 왕비 이름을 본따 만든 와인이다. 이 와인 겉면에도 아시아풍 드레스를 입은 긴 검은 머리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은 길게 늘어진 붉은색 도포를 입고 손에 와인잔을 들었다.

그림처럼 세라자데는 드레스와 같은 부드러움, 옅고 매혹적인 붉은 루비색을 자랑하는 와인이다. 여운에서는 동양적인 향신료가 느껴진다. 가브리엘라와 비탈레는 이 동양적인 향신료 느낌을 중동 신화 속 왕비로 표현했다.

이 와인은 2023 대한민국 주류대상 구대륙 레드와인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수입사는 나라셀라(405920)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