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꼭 사야 하는 와인이 있다. 이 와인에서만 나는 독특하고 달콤한 과일향과 모카, 송로버섯 향이 따스한 느낌을 준다.영국 더 타임즈 'Amarone: the perfect Italian red for autumn'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함께 매년 전 세계 와인 생산량 1위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하는 와인 생산 대국이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자라는 포도 품종은 3000여 종에 달한다. 이렇게 다양한 포도로 만든 무수한 와인 가운데 '가을과 가장 잘 맞는 와인'을 꼽기란 쉽지 않다.
제인 맥퀴티는 영국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명예훈장(MBE)'를 받은 와인 전문가다. 그는 1980년부터 40년 넘게 와인 관련 칼럼과 책을 써왔다. 맥퀴티가 '가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으로 꼽은 와인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나는 아마로네(amarone)라는 와인이다.
이 와인은 샤토 무통 로칠드나 샤토 라투르처럼 특정 와인 브랜드 이름이 아니다. 이탈리아 북부 베로나 인근 발폴리첼라(Valpolicella) 지역에서 특정 방식으로 만드는 와인을 모두 일컫는다.
발폴리첼라는 라틴어로 '포도주 저장고가 많은 계곡(Valley of many cellars)'이라는 뜻이다. 으레 라틴어에서 유래한 지역명이 그렇듯 이 지역 역시 2000년 전부터 와인을 만들었을 정도로 역사가 길다.
단지 역사가 길 뿐만 아니라 와인을 만드는 방법도 독특하다. 발폴리첼라 지역에서는 4세기 무렵부터 포도가 완전히 익은 11월 중순 가장 잘 익은 포도를 직접 손으로 선별해 수확한 후 바람이 잘 통하는 볏짚이나 대나무 채반 위에 올려놓고 4~5개월 동안 바짝 말린다.
아파시멘토(Appassimento)라 불리는 이 방식은 일반 양조보다 공정이 까다롭다. 자칫 온도나 습도 조절을 잘못하면 기껏 고른 좋은 포도에 곰팡이가 슬 수도 있다. 포도 껍질에 균이 옮겨붙지 않게 세심한 손질과 관심도 필요하다.
이 지역 생산자들은 1600년 넘게 이 방식으로 건포도를 만들어왔다. 이렇게 포도를 말리면 와인은 수분은 줄어들고, 줄어든 수분만큼 당도가 높아진다. 자연히 이 포도로 만든 와인 향과 맛도 이전보다 짙어진다.
오랜 건조 기간을 버틸 수 있을 만큼 생명력이 긴 포도를 키우려면 비가 적게 내리고 사계절 내내 햇볕이 강렬하게 들어야 한다. 발폴리첼라는 강우량이 적고 일조량이 풍부할 뿐 아니라, 이름처럼 계곡 지형이라 충분한 바람이 사시사철 분다. 포도를 말리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다.
다만 이렇게 포도를 말리면 수분이 날아가면서 질량이 줄어든다. 아무리 공들여 관리해도 일부는 상하거나 와인을 만들 만큼 충분히 마르지 않는다. 자연히 수분을 머금은 일반 포도로 만들 때보다 와인 생산량이 현저하게 감소한다.
그래서 아마로네는 이전에는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이 와인을 마실 여력이 충분한 왕족이나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특히 이 와인은 셰익스피어가 유럽에 명성을 떨쳤던 17세기 이후에는 '달콤쌉싸름(bittersweet)한 사랑'을 표현하는 와인의 대명사로 꼽혔다. 발폴리첼라에서 15킬로미터(km)만 가면 나오는 베로나 지역은 '로미오와 줄리엣' 실존 인물이 살고 사랑했던 무대다.
말린 포도는 달콤함을 한층 살려준다. 동시에 말린 포도가 품은 당분은 와인 도수를 높인다.
일반적인 레드 와인은 알코올 도수가 13~14%다. 반면 아마로네는 말린 포도가 가진 높은 당분을 효모가 오래 먹고 자란다. 도수는 15~17%까지 올라간다. 술은 도수가 높아지면 보통 쓴맛이 배가된다.
높은 알코올 도수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것 같지만 실제로 맛을 보면 진하고 묵직한 첫인상 뒤로 건포도의 달콤함을 감추고 있어 의외로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간다.
그야말로 달콤하면서 씁쓸하다. 맥퀴티를 포함해 여러 와인 전문가들이 가을에 꼭 마셔야 할 와인으로 아마로네를 꼽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전에 귀족 와인이었던 아마로네는 19세기에 들어와 포도 재배 기법이 현대화되고, 와인의 밀봉이나 장기 보관 관련 기술도 고도화되면서 일반 와인 소비자들도 즐길 수 있을 만큼 가격이 낮아졌다.
여러 아마로네 생산자 가운데서도 마시(Masi)는 7대째 가족 경영을 하는 유서 깊은 와이너리다. 특히 코스타세라 아마로네는 마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와인으로 100% 말린 건포도로만 와인을 만든다.
마시는 대나무로 만든 건조대 위에 포도송이를 놓고 말린다. 이 기법은 밀짚을 주로 사용하는 다른 생산자들 방식보다 바람이 잘 통한다.
마시 관계자는 "와인이 가진 풍미가 진한 편이기 때문에 따로 음식을 곁들이지 않고 파마산, 페코리노, 고르곤졸라 같은 숙성 치즈만을 안주 삼아도 충분히 즐기기 좋다"며 "마시기 2~3시간 전에 미리 병을 열어서 공기와 충분히 접촉을 시킨 다음 다른 와인보다 1~2도 정도 높은 온도로 마시면 더 풍성한 향을 느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코스타세라 아마로네는 2023 대한민국 주류대상 구대륙 레드와인 부문 대상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레뱅이 수입·유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