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전 세계에서 네번째로 큰 와인 생산국이다.
미국 농무부(USDA)에 따르면 아칸소와 하와이를 뺀 나머지 48개 주에서 와인을 만든다. 전역에 펼쳐진 와인 양조용 포도밭을 합치면 110만에이커에 달한다. 서울시 8배에 달하는 면적이다.
이 가운데 고급 와인이 즐비하기로 유명한 캘리포니아주(州) 나파밸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4% 남짓이다. 서울시 3분의 1 정도 크기다. 강남·서초·송파·강동구에 동작·관악·금천·영등포구를 합친 규모와 비슷하다. 여전히 적지 않은 땅덩이다.
이렇게 드넓은 나파밸리에서 가장 좋은 포도밭을 딱 한군데만 고르기란 언뜻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역사와 평론가, 무엇보다 가격은 모두 한 곳을 지목한다.
‘투 칼론(To Kalon)’이라는 밭이다.
이 밭은 크기가 2.5제곱킬로미터(km²)에 그친다. 압구정동과 비슷하다. 미국 전역 포도밭 110만에이커에 비교하면 0.04%에 불과하다. 서울시 8개를 합쳐놓은 미국 전역 포도밭에서 압구정동만한 포도밭으로 크기를 줄였으니, 자연히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기 어렵다.
미국 현지에서 이 포도밭 포도로 만든 와인은 와이너리 공식 출시가 기준 200달러(약 26만원)에서 500달러(약 66만원)를 넘나든다.
그나마 만드는 와이너리도 20곳 안팎 뿐이다. 이들은 보통 오랜 회원들에게 먼저 주문을 받아 거의 전량을 할당한다. 일반 소비자가 본인이 원하는 생산자가 투 칼론 밭 포도로 만든 와인을 사려면 출시가에 웃돈을 얹어줘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 밭을 예수의 피를 담았던 성배에 비유했다. 이 밭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이 은밀하게 숨겨진 성배만큼 찾기 어렵지만, 만난다면 그만큼 황홀한 경험을 선사한다는 뜻을 담은 중의적 표현이다.
미국 현지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이 와인들이 최근 우리나라에 대거 상륙했다. 국내 주요 와인 수입사들이 충성도 높은 소비자가 많은 미국산 초고가 와인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결과다.
최근 증시에 상장한 나라셀라(405920)는 이달부터 토칼론 빈야드 컴퍼니(To Kalon Vineyard Company) 와인을 수입·유통하기 시작했다. 투 칼론이라는 밭 이름은 본래 ‘빼어나게 아름답다’는 그리스어에서 따왔다. 영어 식으로 읽으면 투 칼론이지만, 그리스어 발음을 따르면 토 칼론이다.
토칼론 빈야드 컴퍼니 H.W.C는 1868년 이 밭을 처음으로 개간한 해밀튼 크랩(Hamilton Crabb)에게 바치는 헌사 같은 와인이다. 우리나라에는 120병만 들어왔다. 이 와인은 29번 고속도로와 맞닿은 밭에서 자란 포도를 엄선해 만든다. 투 칼론 전체에서 알짜배기에 해당하는 가장 비옥한 구역이다. 지난해 12월에는 유기농 인증을 받았다.
김현빈 나라셀라 브랜드 매니저는 “널리 알려진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만 사용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로운 향과 맛, 잘 정돈된 타닌이 인상적인 와인”이라며 “미국 와인에 가지고 있던 편견을 지울 만큼 강렬한 경험을 선사해 주는 투 칼론 밭의 정수(精髓)”라고 평가했다.
국내 최대 와인수입사 신세계L&B는 올해 하반기부터 투 칼론 밭을 가장 많이 보유한 유명 와이너리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로버트 몬다비는 투 칼론 밭을 가장 많이 보유한 와이너리다. 전체 투 칼론 밭 가운데 70%가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 소유다. 와이너리 창립자 로버트 몬다비는 1966년 와이너리를 세울 당시 그다지 비싸지 않았던 이 밭을 대거 사들였다. 다른 와이너리보다 생산량이 많은 편이라 여러 투 칼론 밭 와인 가운데 가장 찾아보기 쉽다.
토칼론 빈야드 컴퍼니와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를 모두 보유한 미국 주류 대기업 컨스텔레이션 브랜즈의 이상돈 한국지사장은 “고가 미국 와인에 대한 한국 소비자 수요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며 “고가 와인을 지금보다 다양하게 선보이고, 물량도 더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 밖에도 국순당은 렐름셀러(Realm Cellars), 에노테카코리아가 폴 홉스(Paul Hobbs)에서 만든 투 칼론 밭 와인을 국내에 수십병 가량 들여오고 있다.
이 두 와이너리는 투 칼론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앤디 벡스토퍼(Beckstoffer)라는 유명한 포도 재배자가 키운 포도를 사서 와인을 만든다. 벡스토퍼는 채 300년이 되지 않은 미국 와인역사에서 첫 손에 꼽히는 포도 재배자다. 뉴욕타임즈(NYT)는 그를 ‘포도왕(The Grapelord)’이라 부른다.
포도왕이 키운 포도는 나파밸리 평균 포도보다 값이 9배 이상 비싸다. 비싼 포도 가격은 와인 가격에 전가된다. 같은 투 칼론 이름을 가진 밭에서 난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도 벡스토퍼라는 이름이 붙으면 출시가는 400달러(약 53만원) 이상으로 훌쩍 뛴다. 대신 그의 이름이 최고 품질 포도로 만들었다는 증거로 남는다.
우리나라 와인 시장에서 미국산 고가 레드 와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년 급상승하고 있다.
관세청 통계를 살펴보면 금액 기준으로 2018년 2458만달러(약 323억원)에서 지난해 7727만달러(약 1015억원)로 4년 사이 3배 이상 급증했다.
올 들어 국내 와인 시장이 완연한 침체 기미를 보이는 와중에도 미국산 레드 와인이 차지하는 입지는 넓어지는 추세다.
금액을 기준으로 한 미국산 레드 와인 시장 점유율은 2018년 16%에서 지난해 22%, 올해 24%로 매년 올랐다. 물량 기준 점유율은 같은 기간 3%포인트(P) 올랐다. 금액 기준 점유율 상승폭(8%포인트)이 훨씬 크다. 단순히 국내 와인 시장이 전반적으로 불어났기 때문에 고가 미국 와인 수요가 따라 늘어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와인업계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서 미국 고가 와인을 찾는 소비자들은 투 칼론처럼 인지도가 높은 유명 밭에서 났거나, 앤디 에릭슨 혹은 로버트 몬다비처럼 유명 생산자가 만든 와인을 선호한다고 평가했다.
세계 최고가 와인이 나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은 밭고랑 하나, 돌담 하나까지 경계 삼아 포도밭에 등급을 나눈다. 특등급 포도밭을 뜻하는 그랑크뤼(grand cru)부터 훨씬 넓은 부르고뉴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레지오날(regional)까지 지위가 확실하게 갈린다.
부르고뉴와 쌍벽을 이루는 유명 산지 프랑스 보르도 메독 지방 역시 일찍이 1855년부터 계급을 1등급부터 5등급까지 차례대로 분류했다.
반면 미국은 프랑스처럼 확실한 등급별 체계를 두지 않았다. 미국 연방정부는 현재 구역 별로 미국 와인용 포도 재배 지역(AVA·American Viticultural Areas)를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부르고뉴나 보르도처럼 시장 평가에 직관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1983년 시행 이후 40년째 매년 수정을 거듭하는 중이다.
한국소믈리에협회 관계자는 “그동안 미국 와인이 그저 ‘진하고 단순하다’고 생각했던 소비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팬데믹 기간 와인 중흥기에 섬세하고 세련된 고가 미국 와인의 가치를 알아 차렸다”며 “이들은 복잡한 미국식 지역 구분을 따라 와인을 고르기 보다 평소 믿고 마시던 브랜드, 혹은 특정 밭에서 난 와인을 신뢰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