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프랑스는 한국과 일본처럼 두말할 나위 없는 앙숙이다. 백년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처럼 역사적으로 두 나라는 수시로 다퉜다.

하지만 주류 시장에 있어서만큼은 서로 상부상조했다. 프랑스산 고급 와인 최대 수입국은 매번 영국이 차지한다. 영국의 자랑 스카치 위스키 최대 수입국 역시 프랑스다. 마치 한국과 일본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케와 막걸리를 서로 추켜 세우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올해 들어 스파클링 와인을 두고 두 나라 사이 분위기가 급변했다. 발단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주류 브랜드 모엣 헤네시였다.

모엣 헤네시는 세계 최대 고가 소비재 기업으로 유명한 프랑스 LVMH그룹에서 주류(酒類)에 해당하는 와인·증류주 부문을 담당한다. 모엣 샹동, 돔 페리뇽, 루이나, 크루그, 뵈브 클리코 같은 내로라하는 프랑스 샴페인 브랜드가 모엣 헤네시 소속이다.

필립 샤우스 모엣 헤네시 글로벌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연말 영국 유력 일간지 텔레그래프와 인터뷰에서 프랑스 샴페인이 영국산 스파클링 와인보다 얼마나 월등한지 강조했다.

샴페인은 전 세계인에게 ‘축하’를 상징하는 대명사 같은 와인이다. 샴페인은 300년이 넘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이름마저 유럽연합(EU) 원산지 명칭 보호법에 따라 독점적인 권한을 인정 받았다. 오로지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규정을 지켜 만든 스파클링 와인에만 이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만큼 샴페인 브랜드들의 자부심도 하늘을 찌른다.

그래픽=손민균

여느때 같으면 가볍게 넘겼을 영국 와인업계는 이 말에 유난히 격하게 반응했다.

해당 인터뷰는 지난해 9월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한 이후, 찰스 3세 즉위를 앞두고 나왔다. 70년 만에 새 국왕 즉위를 앞두고 영국인들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을 무렵이다. 영국 와인업계도 모처럼 대목을 맞았을 때다. 당시 주요 브랜드가 모두 이 시기에 맞춰 왕실 번영을 기원하는 축하 와인을 브랜드마다 발표하고 있었다.

전 국가적인 잔치 분위기에 프랑스 대표 기업 수장이 말 한마디로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곧 영국 학계에서는 ‘영국 스파클링 와인 역사는 왕립학회에 크리스토퍼 메렛(Merret)과 조지 다우닝(Downing)경이 스파클링 와인 양조법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166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며 ‘샴페인 생산에 쓰는 여러 기술이 영국 와인 양조가들로부터 나왔으니 원조는 우리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영국왕실재단(Royal Collection Trust)은 찰스 3세 대관식 공식 와인으로 샴페인 대신 하이그로브 가든(Highgrove gardens)이 만든 ‘로얄 컬렉션 코로네이션 2023′을 꼽으며 지원에 나섰다.

영국왕실재단은 왕실에 관한 기념품과 수집품, 선물을 총괄 관리하는 부서다. 영국왕실재단은 꼭 70년 전이었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 때 공식 와인으로 프랑스 샴페인 모엣 샹동을 선정했다. 모엣 샹동은 영국 스파클링 와인을 낮춰봤던 샤우스 CEO가 이끄는 모엣 헤네시를 대표하는 브랜드다.

영국에 근거를 둔 세계적인 주류 산업 전문지 더 드링크 비즈니스의 앨리스 리앙 에디터는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 때만해도 영국은 포도가 자라기 너무 추워 비용편익(benefit-cost)이 떨어졌고, 양조 기술 역시 프랑스에 뒤쳐졌다”며 “2000년대 이후 지구 온난화로 영국 남부 기온이 높아지면서 상황이 극적으로(dramatically) 변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영국 와인은 낯설다. 그러나 런던을 중심으로 동쪽, 남쪽에 바로 붙은 에섹스(Essex)와 서섹스(Sussex), 켄트(Kent) 지역은 와인 성질을 판가름하는 토질이 프랑스 샹파뉴 지방과 별반 다르지 않다. 켄트 지역 같은 경우, 지리적으로 프랑스 항구 도시 칼레(Calais)에서 배로 80분 거리에 그칠 만큼 가깝다.

리앙 에디터는 “영국에서도 이제 햇볕이 잘 드는 남쪽 경사면 밭에서 포도를 키우면 샴페인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질 좋은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 수 있다”며 “포도 재배와 양조에 관한 전문 지식 수준이 세계적으로 상향 평준화된 것도 영국 스파클링 와인 품질 향상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이를 증명하듯 영국 와인 산업은 최근 들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영국와인협회(WineGB)에 따르면 5년 사이 영국 내 와인용 포도 재배 면적은 70% 늘었다. 기간을 20년으로 넓히면 5배 가까이 증가했다. 판매량을 기준으로 하면 2019년 550만병에서 2021년 930만병으로 3년 만에 69%가 뛰었다. 눈을 가리고 시음하는 세계 유수의 와인 품평회에서 구스본, 나이팀버 같은 영국 스파클링 브랜드 와인은 프랑스 샴페인을 누르고 수차례 수상에 성공했다.

영국 스파클링 와인 기세가 거세지자, 일부 프랑스 샴페인 브랜드는 영국 스파클링 와인 브랜드들과 맞붙는 대신 손을 잡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샴페인 하우스 태탱저(Taittinger)가 대표적이다. 태탱저는 영국 와인 브랜드 해치 맨스필드(Hatch Mansfield)와 협력해 켄트 지역에 도멘 에버몬드를 세웠다. 영국과 프랑스가 함께 만든 첫 스파클링 와인은 2024년 나올 예정이다.

태탱져를 이끄는 피에르 에마뉴엘 태탱져 회장은 합작 와이너리 홈페이지에 “에버몬드(Evremond)는 샴페인이 막 세상에 등장했을 1600년대 후반 무렵, 당시 찰스 2세가 재임하던 영국에 샴페인을 처음으로 알린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 이름”이라며 “꼭 샴페인에 견줄 만한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기 보다, 영국 땅에서 영국 포도로 만든 진정 탁월한 영국산 와인을 만드는 데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