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역사는 기원전 6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올해로부터 약 8000여년 전이다. 지난 8000년 동안 아시아는 와인 시장 중심에 서 본 역사가 없다.
2000년대 즈음 잠시 분위기가 바뀌었다. 중국이 세계 와인 시장 큰 손으로 막 떠오르던 시점이다. 하지만 열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최근 세계 와인 시장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전만 못하다.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와인 수입량은 33만6000킬로리터(kl)로 2021년보다 21.1%, 수입 금액은 14억3900만달러(약 1조9000억원)로 15.2% 뒷걸음질 쳤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매 집권기마다 부패 척결과 호화 사치 풍조 배격을 강조하면서 외국산 고가 와인이 설 자리가 갈수록 좁아진 탓이다.
'중국인이 중국산 포도로 만든 중국 와인이 최고'라는 와인굴기(屈起)가 중국 지도층에 뿌리 내리기 시작한 점도 한 몫 했다. 무엇보다 중국 경제 성장률이 예전보다 낮아지면서 와인 수입에 악영향을 미쳤다.
중국 와인 시장이 흔들리자 와인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다시금 세계 와인 시장에서 아시아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중국 와인 시장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아시아 와인 시장은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번에는 한국과 홍콩, 베트남, 태국 같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줄줄이 나서 중국의 빈 자리를 메웠다.
국제와인기구(OIV)에 따르면 우리나라 연간 와인 소비량은 2001년 850리터에서 2021년 4910리터로 477.7% 늘었다. 20년 만에 와인 소비량이 약 6배 증가했다.
홍콩 역시 2001년 940리터에서 2021년 3070리터로 226.6% 뛰었다. 매년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는 베트남, 태국에서도 와인 시장 성장률은 무섭게 치솟고 있다.
"아시아 소비자들은 젊고 열정적입니다.와인이라는 새로운 술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습니다.오히려 호기심을 가지고 더 알아보려고 합니다."루돌프 라메즈 비넥스포지엄 최고경영자
지난달 23~25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비넥스포 아시아(Vinexpo Asia)'는 이들 아시아 국가가 세계 와인 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이전보다 얼마나 높아졌는지 증명하는 자리였다.
비넥스포는 1981년 프랑스 보르도 지롱드상공회의소가 시작한 와인 중심 종합 주류 박람회다. 독일 프로바인(Prowein), 이탈리아 빈이탈리(Vinitaly)와 함께 세계 3대 주류 박람회로 꼽히지만, '와인 종주국' 프랑스에서 시작했다는 독보적인 상징성과 정통성을 자랑한다. 일반인이 아닌 전문인만 대상으로 하는 박람회기 때문에 사업 성과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도 장점이다.
비넥스포는 프랑스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비넥스포 아시아'라는 대규모 박람회를 연다. 1998년 이후 줄곧 홍콩에서 열렸던 비넥스포 아시아는 올해 처음으로 싱가포르로 자리를 옮겼다.
비넥스포 아시아를 주최하는 비넥스포지엄에 따르면 올해 박람회에는 64개국에서 와인 업계 관계자 9989명이 참석했다. 국가 별로 보면 개최국 싱가포르 참가자가 가장 많았다. 이어 중국, 인근 국가에 해당하는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참가자들이 몰렸다. 한국 또한 상위 9위를 기록했다.
국내에서는 와인수입업계 1위 신세계엘앤비와 롯데칠성음료, 금양인터내셔날, 아영FBC, 신동와인, 에노테카코리아 등 주요 수입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들 수입사에게 비넥스포 아시아 같은 주류 전문 박람회는 소리없는 전쟁터다. 가령 신세계그룹이 인수한 미국 나파지역 와이너리 쉐이퍼(Shafer)는 공교롭게도 경쟁사 롯데칠성음료가 주력 제품으로 삼는 오린 스위프트(Orin Swift) 바로 옆에 부스를 차렸다.
주요 수입사들은 이미 있던 와인 생산자들과 관계를 돈독히 다지면서, 새로운 거래처를 찾는데 여념이 없었다. 주최 측에 따르면 박람회에 부스를 마련한 와이너리와 수입사가 사전에 잡은 만남 예약 건수는 3500건을 넘겼다.
고든 지비 호주와인그룹 영업 총괄은 "비넥스포 아시아는 단순히 판매자와 교류하는 단계를 넘어, 전 세계 와인 소비자가 원하는 점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수요를 창출하기 적합한 장소"라며 "호주 와이너리들은 그동안 중국 와인 수입사들과 세금 문제로 여러 문제를 겪었는데, 올해 비넥스포 아시아를 통해 중국과 관계를 다시 쌓아가는 기회를 만났다"고 말했다.
올해 비넥스포 아시아는 2019년 홍콩 비넥스포 이후 팬데믹으로 멈춰있다 4년 만에 다시 열렸다. 그만큼 그간 달라진 세계 주류 시장 흐름을 선명하게 보여줬다. 이 흐름은 오는 10월 서울에서 열리는 우리나라 최초 비넥스포 미팅 이벤트 '라이징 코리아'로 이어질 예정이다.
① 프랑스 와인도 좋지만… 세계는 넓다
비넥스포에서는 전통적으로 프랑스 와인이 강세를 보였다. 이 박람회는 뿌리를 프랑스 최고 와인 산지 보르도에 두고 있을 뿐 아니라, 본 행사 역시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열린다.
그러나 올해 비넥스포 아시아에서 선보인 와인 가운데 프랑스산 와인은 35%에 그쳤다. 나머지 지역 와인이 65%를 차지했다. 3병 가운데 2병은 프랑스가 아닌 다른 나라 와인이었다.
매년 비넥스포는 '명예 주빈국(country of honor)'을 꼽는다. 여러 와인 생산국 가운데 딱 한 국가를 꼽아 행사 기간 내내 가장 중점적으로 자국 와인을 알릴 기회를 주는 방식이다.
올해 명예 주빈국은 프랑스가 아닌 미국이 차지했다. 캘리포니아와 오리건, 워싱턴주에서 나는 미국 서부 와인이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 홍콩, 대만, 베트남 같은 주요국에서 두루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결정이다.
공식행사 전날 프랑스 와인 전문 매체 '베탄느 에 드소브'가 주최한 대규모 와인 시음 행사에서도 프랑스에서는 시중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다소 평범한 와인들을 출품했다.
반면 프랑스 외(外) 국가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품귀 현상을 빚는 컬트(cult) 와인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컬트 와인이란 놀랄 만한 맛과 구하기 힘들 만큼 적은 생산량으로 열광적인 추종자를 거느린 와인을 뜻한다. 호주의 클라우드버스트(cloudburst)나 중국 제이드빈야드가 대표적인 예다.
밍 푸 롤랑 코이페 아시아 담당 마켓 엔지니어는 "올해 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비넥스포 파리에 비하면 프랑스 와인보다 다른 국가 와인 비중이 월등하게 높다"며 "특히 미국이나 호주, 칠레 같은 신대륙(new world) 프리미엄 와인들이 다수 보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싱가포르가 주류에 붙는 세금은 높지만,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무역 요충지라 프리미엄을 찾는 인적 자원이 많이 몰린다"며 "이 점을 감안해 주최 측이 아시아 와인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신대륙 프리미엄 와인 생산자를 다수 끌어들였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② 유난히 빛나는 여성 와인 전문가들
대다수가 와인업계는 보수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와인 업계만큼 유리천장이 얇은 곳도 드물다.
지난해 아시아 소믈리에 대회 우승자 한희수 소믈리에처럼 소믈리에 실력은 성별이 아닌 서빙과 테이스팅 능력으로 판가름 난다.
현 시점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와인 평론가이자 '와인의 여왕'이라 불리는 잰시스 로빈슨 역시 여성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으로 꼽히는 '도멘 리로이(Leroy)' 역시 랄루 비즈-리로이(Lalou Bize-Leroy)라는 할머니 손에서 나온다.
올해 비넥스포 아시아는 와인업계에서 갈수록 두드러지는 여성 와인 전문가를 여러 방면으로 재조명했다.
박람회와 동시에 와인 전문가를 상대로 열린 학술 프로그램 비넥스포 콘퍼런스 세션에서는 '와인과 증류주 산업에서 커진 여성의 힘'을 주제로 삼았다.
이 세션에서는 마스터 사케 소믈리에 재니스 치와 싱가포르 최초 크래프트 맥주 브루어리 '레드닷 브루하우스'에서 맥주 양조 총괄을 맡은 크리스탈라 후앙 브루 마스터가 참석해 '주류 업계는 평등하다'고 강조했다.
일본에서는 박람회 중 '사쿠라 와인 어워드'에서 수상한 와인들을 시음하는 별도 자리를 마련했다. 사쿠라 와인 어워드는 심사 위원 전원을 여성으로 구성한 와인 품평회 가운데 가장 큰 품평회다. 매년 30여개국에서 출품한 4500여개 와인을 일본 국내외 여성 와인 전문가 500여명이 평가한다.
사쿠라 와인 어워드가 팬데믹 기간에도 성장세를 이어가자, 프랑스에서도 '프랑스의 여성과 와인(Femmes et Vins de France)'이라는 비슷한 품평회가 새로 생겼다.
마리아 헤수스 로하스 VSPT 와인그룹 앰배서더는 "VSPT 와인그룹을 상징하는 와인 브랜드 '1865′ 생산 총 책임자도 여성 와인 메이커 안드레아 칼데론"이라며 "그녀는 1990년생으로 개방적인 칠레 와인업계에서도 어린 축에 속하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능력만으로 총 책임자 자리를 따냈다"고 평가했다.
③ 日 사케 르네상스… 와인에 견주는 亞 대표 술로
일본 젊은 세대들은 갈수록 술을 마시지 않는다. 일본 알코올 소비량은 1995년 1인당 연간 평균 100리터에서 2020년 75리터로 25% 떨어졌다.
자연히 일본 정부가 걷는 술 관련 세금도 대폭 줄었다. 재패니즈타임즈에 따르면 일본 전체 세수 가운데 알코올 판매 세금 비중은 5%에서 2020년 1.7%로 3분의 1토막 났다.
상황이 이렇자 최근 일본 정부는 일본 청년들은 물론 전 세계 주류 애호가를 대상으로 '마셔서 응원하는' 일본산 주류 소비 촉진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2022년 8월 일본 국세청이 내놓은 '사케 비바!(Sake Viva!)'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박람회 내내 열린 행사에서도 일본 정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은 빛이 났다. 마스터 클래스에서는 싱가포르 사케 전문가 션 우가 '사케의 아름다움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사케를 시음하는 전문가 교육 프로그램을 열었다.
일본 미야기현 고급 사케 브랜드 '이치노쿠라(一ノ蔵)'에서는 판매 총괄책에 해당하는 나가이 세이지 세일즈 매니저가 나와 강한 향신료를 듬뿍 넣은 동남아시아 음식에도 일본 사케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열변을 토했다.
싱가포르 최고의 와인바로 꼽히는 파크90의 메이슨 응 와인 디렉터는 "한국 막걸리는 이제 막 싱가포르 소믈리에들 사이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막걸리와 비슷한 일본산 니고리자케(濁り酒)는 이미 여러 고급 중식 레스토랑 주류 리스트에 올라있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다"고 했다.
그는 "와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사케 특유의 풍부한 누룩(yeast)향, 입안에서 감도는 은은한 곡물 맛을 '고급스럽다'고 여기는 소비자가 싱가포르 내에서도 빠르게 늘고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