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대추막걸리는 병뚜껑을 따기 전, 절대 흔들면 안됩니다. 뚜껑도 한번에 다 열지 마시고, '살짝 열었다 닫았다'를 여러번 반복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탄산이 올라와 술이 다 넘쳐버립니다. "
스파클링막걸리를 여럿 봤지만, 대추가 부재료로 들어간 스파클링막걸리는 처음이었다. 색깔부터가 대추 속살같은 갈색을 띠었다. 맛이 궁금했다. 더 참지 못하고 양조장에서 시키는대로 술병을 열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뚜껑을 정말 아주 살짝 열었다 닫았다를 서너번 반복했다. 그러자, 병 속의 잠자던 막걸리가 깨어나는게 보였다. 화가 난듯, 투명 막걸리 병속을 아래 위로 마구 헤집는게 아닌가. 금방이라도 뚜껑을 박차고 세상(술병) 밖으로 솟구쳐 나올 것 같았다.
이 모습을 보니, 엉뚱하게도 갑자기 베토벤의 합창교향곡 4악장이 생각났다. 화산 용암이 폭발하듯, 합창단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주는 '환희의 송가'가 떠올랐다. 괴테와 동시대를 살았던 독일의 대문호 프리드리히 쉴러의 시 작품이, 귀가 멀기 시작한 베토벤이 마지막 불꽃을 태워 완성한 교향곡에 실린 곡이 합창교향곡 4악장이 아니던가.
환희여, 신들의 아름다운 빛이여, 낙원의 딸이여.
우리는 불에 취해, 신성한 그대의 성전에 발을 들여놓네.
다행히 대추막걸리는 넘치지 않았고, 맹렬했던 술 기포가 다소 진정이 되자, 술병을 다 열어제쳤다. 대추농축액이 들어간 밀양대추막걸리는 어떤 맛일까? 쌀과 대추의 단맛이 잘 어우러진 고급진 막걸리였다. 약재로도 많이 쓰이는 대추는 원래 단맛이 강한 편이다. 첫잔이 다음 잔을 부르다보니 작지 않은 한병(800ml)이 금방 동이 났다. 그런데, 지금껏 맛보지 못한 막걸리였다. 오미자, 딸기, 샤인머스켓 등 갖가지 부재료가 들어간 막걸리를 맛봤지만, 대추막걸리는 처음이었고, 또 맛도 기가 막혔다.
그런데, 대추막걸리의 기포(끊임없이 올라오는 샴페인의 거센 방울과 마찬가지)가 왜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을 연상시켰을까? 대추막걸리를 빚는 밀양클래식술도가 박종대 대표의 얘기를 미리 들은 선입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밀양클래식술도가의 모든 막걸리는 발효 기간 내내 서양 클래식 음악을 듣습니다. 클래식의 잔잔하고 섬세한 리듬이 술 발효, 숙성 과정에서 효모의 활동성을 깨웁니다. 막걸리 발효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효모가 어떻게 활발하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술맛이 달라집니다."
20대부터 클래식 듣기가 '평생의 취미'였다는 박 대표. 그래서 지금도 양조장 한켠을 클래식 감상실로 꾸며놓았다. "밤에는 아무래도 이웃 민원이 생길 수 있어 음악 볼륨을 좀 낮추어요. 정말, 밤에 음향을 낮추면 막걸리 효모의 활동성이 떨어지고, 소리를 크게 트는 낮에는 활동성이 올라가요."
경남 밀양의 양조장 밀양클래식술도가. 전국에 1000개도 넘는 양조장이 있지만, 양조장 이름에 클래식을 넣은 양조장은 이곳이 유일하지 싶다. 박종대 대표가 워낙 클래식을 좋아하는 고전음악 매니아다.
최근 방문한 밀양클래식술도가 발효실은 정말, 클래식음악이 쩡쩡 울리고 있었다. 소근소근 이야기는 귀에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다시 박종대 대표 얘기다. "트로트를 들려주기고 하고, 발라드도 틀어봤어요. 그런데, 클래식을 틀어주니까 술 발효가 가장 안정적으로 되더라고요. 술맛도 약간 더 상큼해서 더 맛있는 것 같았어요. 뭐,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렵겠지만. 식물도, 동물도 음악을 들려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데, 하루하루 익어가는 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양조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저부터가 클래식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요."
사실, 밀양클래식술도가 양조장을 찾아온 이유는 클래식 음악때문만은 아니었다. 밀양클래식술도가는 지난 4월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팝업스토어를 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스톰트루퍼(은하제국 병정) 캐릭터를 본딴 '스톰 탁주'를 내놓은 양조장이 바로 밀양클래식술도가다. 하지만, 박종대 대표는 스톰탁주 얘기는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밀양클래식술도가는 이름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신생양조장은 아니다. 90년 넘는 역사를 가졌다. 박 대표가 양조장을 인수한 것은 2005년으로, 이곳 지명을 따서 처음에는 단장양조장으로 했다가, 2019년에 양조장을 확장, 이전하면서 밀양클래식술도가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을 밀양클래식술도가로 바꾸기 전에도 '클래식 막걸리' 제품은 있었다. 박 대표가 양조장을 인수한 후 가장 먼저 내놓은 제품이다. 클래식 막걸리는 한병에 1200원 정도로 착하다. 원료는 국산이 아닌 수입쌀, 발효제 역시 전통누룩이 아닌 밀 입국을 쓴다.
밀양클래식술도가의 효자 상품은, 밑술에 두번 덧술하는 삼양주인 밀양탁주다. 600ml 한병에 2000원. 밀양지역 쌀로 빚는다. 천연감미료인 스테비올배당체를 일부 넣는다. 밀양클래식술도가 전 제품은 물엿, 설탕은 사용하지 않는다. 다소 드라이한(달지 않은) 맛이 특징으로, 젊은 소비자층이 많은 편이라 한다. 실제로 마셔보니, 묵직하지 않아 부드럽게 잘 넘어갔다. 일주일에 5000병 정도가 판매된다고 한다. 지역특산주 면허로 생산돼, 온라인으로도 살 수 있다.
약주인 클래식청약주도 가격이 7000원으로 착한 편이다. 약주의 쌀 함유량은 탁주보다 30% 더 많다. 그러나, 맛과 향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많이 팔리지는 않지만, 한병에 2만원 하는 프리미엄 약주도 같은 이름(클래식청약주)으로 출시돼 있다.
색깔이 가장 예쁜 술은 마실꾸지. 쌀막걸리에 꾸지뽕을 부재료로 넣었다. 분홍빛 마실꾸지는 단맛이 거의 없는 다소 밋밋한 맛이었다. 꾸지뽕을 넣었다고 하지만, 색상 말고 향이나 맛으로는 꾸지뽕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박 대표 역시 이점을 인정했다. "마실꾸지는 과일의 달콤한 향보다는 담백한 맛이 더 도드라지는 막걸리입니다. 꾸지뽕 열매는 가을 한철에만 나기 때문에 사계절 냉동 상태로 보관해두었다가 직접 으깨서 발효 단계의 막걸리에 넣습니다."
밀양클래식술도가 제품 중 가장 인상적인 술은 대추막걸리였다. 술 발효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기는 탄산을 밖으로 배출하지 않고 잘 가둬, 스파클링 막걸리로 만들었다. 800ml 한병에 만원, 판매량이 많지 않고, 유통기한도 짧은 편이라, 주문 후 생산한다. 스파클링 막걸리에 익숙하지 않은 소비자가 술병을 열다가, 막걸리가 흘러넘치는 '사고'가 적지 않아 1000ml 병 용량에 800ml만 술을 담는다. 대추막걸리는 일주일에 100~120병 정도 판매되고 있다.
이곳 양조장은 대추막걸리 외에 딸기 막걸리도 개발 중에 있다. 개발 단계에 있는 또다른 신제품은 사과막걸리다. 옛부터 밀양의 얼음골 사과는 당도가 높기로 유명했다. 얼음골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일교차가 큰 편이라서, 높은 당도의 사과가 재배돼왔다. 또, 강수량은 상대적으로 적어, 과육이 단단하고 산뜻한 과즙이 풍성하다고 알려져왔다. 그런데, 얼음골 사과 막걸리는 왜 아직 나오지 않았을까?
"사과는 신맛이 강한 과일인데, 막걸리 재료로는 쉽지 않습니다. 시제품을 만들어보니, 유통기한이 10일도 안가지 뭡니까. 산미가 강하다 보니, 금방 술이 시어 버리는 겁니다. 유통기한이 최소한 한달은 돼야 상품화가 가능한데, 그래서 고민입니다. 2년 전부터 개발 중인데, 아직 시행착오를 더 겪어야 하는 아이템이 사과막걸리인 것 같습니다."
양조장을 찬찬히 둘러보니, 발효탱크, 숙성탱크가 죄다 600l(리터) 소용량이 아닌가? 2019년에 확장한 양조장치고는 발효탱크가 큰 게 없는 게 이곳 밀양클래식술도가의 특징이다. 대용량 탱크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를 박 대표에게 물었다.
"막걸리는 신선함이 생명이라고 봅니다. 또, 저희 양조장은 전국을 대상으로 술을 만든다기 보다는,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술을 빚기 때문에 1만l(리터) 같은 대용량 발효탱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생산량이 판매량보다 턱없이 많으면, 선도관리가 그만큼 어려워지는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매일 마시는 우유를 매일 만드는 심정으로, 저희는 막걸리를 자주 만들어서 매일 고객들에게 신선하게 공급하는 걸, 원칙으로 합니다."
전국의 모든 양조장이 일년에 2억병을 판다는 서울장수막걸리를 '롤 모델'로 삼을 필요는 없다. 대량생산 체제에 적합한 막걸리 양조장이 일부 있지만, 소량 생산 체제가 걸맞는 양조장이 훨씬 더 많다. 중요한 건, 양조인들의 정직함, 근면함이다. 일주일 판매치를 한꺼번에 다 만들지 않고, 조금씩 매일 생산하는 게 술의 신선함에는 훨씬 더 좋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