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고급 주류 가격에 마침내 제동이 걸렸다.

2020년 팬데믹 이후 전 세계적으로 유동성(자금)이 대거 풀리면서 고급 주류 업계는 지난 3년 동안 전례 없는 호황을 맞았다. 특히 생산량이 제한적인 소량 생산 위스키와 작황이 좋았던 해 포도로 만든 프리미엄 와인 생산자들이 큰 수혜를 입었다.

이들 고급 주류는 원액 보유량과 포도 수확량에 따라 만들 수 있는 양이 한정적이다. 필요에 따라 공장에서 생산량을 줄이거나 늘릴 수 있는 소주·맥주와는 사정이 다르다.

지난해 팬데믹이 엔데믹(endemic·일상적 유행)으로 바뀌기 시작하자 전 세계 증시가 일제히 흔들렸지만,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고급 주류 가격은 꾸준히 올랐다.

그러나 올해 들어 마냥 오르던 고급 주류 가격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22일 기준 전 세계 금융시장에서 거래되는 와인 거래 가격을 지수화한 ‘리벡스 파인 와인 1000′은 올해 1월 1일 이후 2.5%가 하락했다.

파인 와인 1000은 영국 런던 와인 거래소 ‘리벡스(LIVEX·London International Vintners Exchange)’가 산출하는 세계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와인 관련 시장 지표다. 2004년 1월 와인 가격을 100으로 놓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거래하는 1000개 와인 현재 값을 비교해 지수화한다.

이 지수는 2020년 3월 이후 지난해 말까지 2년 9개월 동안 44%가 올랐다. 그러나 올해 이후 월간 기준으로 단 한 차례도 상승세를 기록하지 못했다.

투자전문가들은 다른 자산에 비추어 리벡스 지수 하락세가 일시적인 조정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같은 기간 전 세계 증권 거래 시세를 재는 지표인 MSCI월드지수는 9.2% 올랐다.

미국 증시에서 우량주 중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지수 역시 9.6% 상승했다. 대체 자산에 속하는 와인 대신 전통적 투자자산에 해당하는 증시로 돌아가는 투자자가 많아졌다는 의미다.

그래픽=정서희

도멘 드 라 로마네 콩티(Romanée-Conti), 샤토 페트뤼스(Chateau Petrus)처럼 750밀리리터(ml) 1병당 1만 달러(약 1400만원)를 쉽게 넘기는 초고급 와인(울트라 프리미엄 와인) 역시 올해 고전하고 있다.

이들 와인은 투자 대상으로 거래할 만한 가치가 있는 1000개 와인 중에서도 가장 높은 값에 거래되는 상위 50개 와인에 속한다. 이런 초고급 와인 투자자들은 다른 와인 투자자보다 운용하는 자금 규모가 크다. 어지간한 경기 변화가 아니라면 좀처럼 투자 전략을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올해 1만 달러 이상 초고급 와인 50개만을 대상으로 하는 ‘리벡스 파인 와인 50′ 지수는 올 들어 2%가 내렸다. 이들이 주로 선호하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 고급 와인은 3%, 파티나 기념일에 빼놓을 수 없는 샴페인은 무려 7.2% 미끄러졌다. 2.5% 내린 파인 와인 1000보다 하락 폭이 크다. 자연히 큰 손들마저 와인 투자에 인색해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고급 와인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품귀현상을 빚었던 일본산 희귀 위스키 가격은 올해 ‘극적(劇的)’이라고 할 만큼 빠르게 추락하고 있다.

2차 거래 시장이 발달한 일본에서는 도쿄 유명 전당포들이 취급하는 위스키 매입가는 희귀 일본 위스키 시세를 엿보는 가늠자 같은 역할을 한다.

지난 18일 기준 일본 전역에서 가장 큰 전당포 체인 다이고쿠야(大黑屋) 주류 매입 시세를 살펴보면 일본 산토리가 만드는 야마자키(山崎) 싱글몰트 25년 매입가는 지난해 7월 1300만원에서 이달 1000만원으로 23% 떨어졌다.

산토리가 ‘일본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카이코마가타케산(甲斐駒ヶ岳) 증류소에서 빚은 하쿠슈(白州) 싱글몰트 25년 역시 지난해 7월 550만원에서 이달 380만원으로 31% 급락했다.

산토리가 만드는 블렌디드 위스키 가운데 최고봉이라 하는 히비키(響) 30년은 약 1000만원에서 600만원으로 40%가 곤두박질쳤다.

히비키는 산토리가 브람스 교향곡 제1번 제4악장을 떠올리며 만든 위스키다. 특유의 부드러움과 화려한 향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다.

그중에서도 30년은 일본 현지에서조차 내놓기 무섭게 전량이 팔린다. 30년 이상 묵은 원액을 쓰는 만큼 우리나라에는 연간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소량이 들어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후끈 달아오른 인기만큼 식는 속도 역시 빨랐다.

한국소믈리에협회 관계자는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자본시장에 대거 풀린 유동성이 마르고, 부동산과 코인 같은 자산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고급 주류 대체 투자에 나섰던 젊은 투자자들이 하드셀처(탄산수에 알코올과 과일향을 첨가한 술) 같은 가볍게 마실 만한 술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나라 주류 시장도 대체로 세계 시장 움직임을 따라간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내 고급 주류 시장에도 곧 가격 조정기가 닥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