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적인 차원에서 의전(儀典)은 그 나라 품격을 드러내 주는 동시에 국가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도구다. 특히 의전의 꽃 만찬(晩餐)을 한 나라 외교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례는 국제관계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다.
2007년 평양 남북 정상회담 이후 벌어진 답례 만찬에 오른 전주 비빔밥은 남과 북이 하나됨을 상징했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환영하는 국빈 만찬에는 ‘독도 새우’가 등장했다. 방한 직후 일본을 찾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 셈이다.
그 밖에도 프랑스는 공식 연회에서 방문국 외빈이 음식과 와인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먼저 알아보고, 접대하는 음식과 와인을 다르게 한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만찬을 ‘맛있지만, 총성 대신 음식이 오가는 전쟁터’라 말한다.
지난달 26일 열린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국빈 만찬(state dinner) 와인 리스트에도 이런 기류가 읽힌다.
국빈 만찬은 외국 정상 중에서도 가장 격이 높은 국빈 방문(state visit) 때 행하는 특수한 만찬이다. 국제적인 의전 지침에 의해 격식과 품위를 갖춰 진행한다. 각국 외교부는 보통 2~3달 전부터 정상들 종교와 입맛을 고려해 만찬 식탁에 어떤 음식과 술을 내놓을지 논의한다.
건배 제의 역시 국빈 만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절차다. 관례상 국빈만찬 시에는 반드시 축배 제의(Proposal of a Toast)를 행사에 포함해야 한다. 이때 각국 정상은 상대방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건배사를 준비한다.
바이든 대통령 역시 이날 “한국과 미국이 함께 만들어갈 미래를 위하여”라고 건배사를 한 뒤 “앞으로 170년 동안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만찬에 첫 와인으로 등장한 페르디난드(Ferdinand) 알바리뇨 ‘비스타 루나 빈야드’ 2020년산은 바이든 대통령 말대로 앞으로의 170년을 상징하는 와인이다.
이 와인을 만드는 에반 프레이저(Evan Frazier)는 우리나라에서도 팬층이 두터운 미국 유명 와인 브랜드 ‘콩스가르드(Kongsgaard)’에서 총괄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화이트 와인 생산자 콩스가르드는 국내 유통가 기준 1병당 30만원을 넘어서는 최고급 미국 와인 브랜드다.
반면 페르디난드는 그가 콩스가르드 일과 별도로 이끄는 일종의 프로젝트성 와인이다. 본업과 정 반대로 미국에서 주류가 아닌 포도 품종으로, 자유롭고 창의적인 양조 기법을 더해 만든다.
남들이 외면하지만 부가가치가 높은 품종을 가지고 싸지만 마시기 좋은 와인을 만드는 것이 이 페르디난드 프로젝트의 목적이다. 미국 현지 가격 역시 20달러 정도로 비싸지 않다.
프레이저는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백악관이 만찬에 내 와인을 내놓을 것이라고 귀뜸해주지 않아서 이날 만찬이 끝난 후에야 페르디난드 알바리뇨가 만찬 상에 올랐다는 것을 알았다”며 “페르디난드는 미국 땅 캘리포니아에서 스페인 품종에만 집중해 키우는 독창적인 프로젝트인데, 이 부분이 선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와인은 미국을 대표하는 와인 산지 캘리포니아에서도 마시기 편한 와인이 많이 나오는 로다이(Lodi) 지역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들었다. 로다이 지역 포도 재배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딱 17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70년을 돌아보면서 앞으로의 170년을 기약하는 이정표 같은 와인이다.
와인을 만들 때 쓰이는 ‘알바리뇨(Albarino)’는 스페인에서 가장 보편적인 화이트 와인 포도 품종이다. 그러나 9000킬로미터 떨어진 캘리포니아에서 이 품종은 비주류 취급을 받는다.
프레이저는 170년 역사를 가진 미국 산지에서 생소한 외국산 포도로 만든 이 와인을 통해 ‘외국 포도가 미국 땅을 만나 그 숨겨진 가능성을 펼치는 드라마’를 그려내려 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주요 기업들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미국에 1000억달러(약 133조) 이상을 투자해 경제 협력을 도모하기로 했다. 이 와인 역시 한국 기업들의 적극적인 투자로 여러 미국 산업군에서 ‘한국 기업이 미국에서 펼치는 성공 신화’ 같은 작품이 나오길 기대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두번째 와인으로 등장한 야누이크(Januik) 메를로 ‘레드 마운틴’ 2020년산은 이날 만찬 주요리 갈비찜과 함께 나왔다.
야누이크는 캘리포니아보다 훨씬 덜 알려진 워싱턴주(州)에서 만든 와인이다.
워싱턴은 미국 본토 북서쪽 끝에 자리 잡은 주다. 이름 때문에 미국 동쪽에 있는 수도 워싱턴D.C(District of Columbia)와 자주 혼동한다. 미국 사람들조차 ‘워싱턴’ 하면 이 주보다 수도를 먼저 떠올린다는 농담이 돌 정도다.
이 지역은 다른 서부지역이 산업화 과정을 거치는 과정에도 늦게까지 인디언들이 부락을 이뤄 살던 황무지였다. 워싱턴주 주요 와인 산지 가운데 한 곳 왈라왈라(walla walla) 밸리라는 이름도 ‘물이 줄기차게 흐르는 곳’이라는 인디언 말에서 따왔다.
그러나 야누이크를 포함한 1세대 와인 양조가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개간을 해 포도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캘리포니아에 이은 미국 제 2의 와인 산지로 거듭났다. 최근 워싱턴주 일대는 세계적인 평론가들이 높은 점수를 주는 와인이 쏟아지는 ‘미국의 보르도’로 알려졌다.
야누이크 소유주 마이크 야누이크는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와인 만들기를 시작했는데, 마침내 이 지역(워싱턴주 컬럼비아 밸리) 와인이 역사적인 빅 키즈 테이블(VIP 만찬)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며 “야누이크 메를로 레드마운틴은 주류 전문점에서 팔지 않고, 연간 회원에게만 공급하는 특별한 와인”이라고 말했다.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한 비법 같은 건 따로 없었다.오로지 돈을 얼마나 더 쏟아 부어야 하는지 무시했을 뿐.”마이클 야누이크, 야누이크 와이너리 소유주
미국 주류 전문작가 로저 모리스(Roger Morris)는 이 와인이 민·관 합동으로 이뤄지는 미국 특유의 전폭적인 투자를 상징한다고 평가했다. 야누이크는 이 일대를 포도밭으로 가꾸기 위해 평생 와인 도·소매업을 하면서 모은 돈을 전부 쏟아 부었다.
이번 회담에서 우리나라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관련 투자를 약속한 넷플릭스, 미래 에너지원으로 주목받는 소형모듈원자로(SMR)에 투자하기로 한 미국 주요 에너지 기업들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모리스는 “앞선 기술과 뛰어난 인력, 막대한 물량을 투자하는 미국식 투자의 결과물이 야누이크 같은 품질 좋은 와인”이라며 “이 와이너리는 지금 마이크 야누이크의 어린 아들이 직접 양조에 나서고 있는데, 이 역시 ‘의지의 계승(succession)’이라는 측면에서 미국이 동맹국과 나누는 중요한 가치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바나나 아이스크림과 함께 나타난 마지막 와인은 슈램스버그(Schramsberg) 블랑 드 블랑 2019년산이었다.
앞서 등장한 두 와인은 국내에 현재 수입·유통하지 않는 와인들이다. 반면 슈램스버그는 우리나라에 나라셀라를 통해 널리 팔리고 있다. 샴페인처럼 기포가 있는 스파클링 와인이라 만찬 같은 축하자리에 잘 어울린다.
미국 정계에서 이 와인은 더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한 와인이다. 중요한 미국 역사의 순간에 매번 등장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부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이번에 바이든 대통령까지 미국 역대 대통령들은 50년 넘게 세계 정상들을 만날 때마다 슈램스버그를 따른 잔에 건배를 요청했다.
특히 동북아시아에서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1972년 중국 베이징을 찾은 닉슨 대통령은 저우 언라이(周恩来) 당시 중국 총리와 슈램스버그 블랑 드 블랑으로 평화를 위한 축배(Toast to Peace)를 들었다. 냉전을 종식하자는 취지로 열린 만찬 자리였다. 이 후 이 술에는 ‘평화의 술’이라는 별칭이 따라 붙었다.
가뜩이나 동북아시아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미국 대통령이 다시 한 번 슈램스버그 블랑 드 블랑을 꺼내 들었다는 것은 이번 회담이 동북아시아 평화의 기원이 되길 바라는 미국 백악관의 희망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날 국빈만찬 와인을 선정해 추리는 작업을 총괄한 미국 소믈리에 데어린 컬라(Darlin Kulla)는 “만찬 한 달 전쯤 요리를 맡은 에드워드 리 주방장으로부터 와인을 골라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며 “진정 훌륭하다고 생각할 만한 미국 와인을 선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