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오래된 와인이나 위스키를 즐기는 사람에게 '무슨 맛이냐'고 물으면 이런 선문답(禪問答) 같은 답변이 돌아온다.
'시간의 맛'이라는 말이 추상적인 듯 하지만, 위스키 종주국 스코틀랜드에서는 이 표현을 과학적으로 꼼꼼하게 따져보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왔다.
스코틀랜드에서 만드는 스카치(scotch) 위스키는 보통 스페인에서 쉐리라는 와인을 익히는 데 쓰였던 참나무통, 포르투갈에서 포트라는 와인을 만들 때 썼던 참나무통을 사용해 숙성한다.
쉽게 말해 '중고 참나무통'을 이용해 위스키 맛에 쉐리나 포트 같은 다른 술이 가진 개성을 더한다. 위스키 업계에서는 이런 기술을 '티백 효과(tea bag effect)'라고 말한다. 티백으로 두번째 차를 우려낼 때는 첫번째 잔보다 오랜 시간을 우려내야 하는 것처럼, 위스키 역시 다른 술을 익혔던 참나무통에서 맛의 복잡성을 끌어내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다른 어느 국가에서도 따라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과의 싸움'. 스카치 위스키의 자부심은 여기서 온다. 위스키를 만드는 국가가 많아지고, 미국과 일본 혹은 대만 위스키가 스카치 위스키의 자리를 위협해도 스카치 위스키는 여전히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른 국가에서 온도나 습도, 혹은 풍량 등 여러 환경적 요소로 감히 시도하지 못하는 반세기 가까운 숙성이 스코틀랜드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공들여 숙성한 스카치 위스키 특유의 '시간의 맛'은 이렇게 탄생한다.
최근 이렇게 스코틀랜드가 자랑하는 초고연산(ultra aged) 위스키들이 국내 시장에 쏟아지고 있다. 보통 시중에서 21년에서 30년 정도 묵은 위스키는 '고급 위스키'로 통한다. 이들은 각 제조사 정규 제품군에 속해 면세점이나 주류 전문점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30년을 넘어 40년을 숙성한 제품으로 넘어가면 초고연산으로 특별히 취급한다. 이들 제품은 전 세계적으로 매년 적게는 100여병, 많아도 300병 정도만 만든다. 백화점 특별 코너, 해당 브랜드 팝업 스토어에서나 간신히 눈에 띄는 정도다.
극히 희귀하다보니 초고연산 위스키 몸값은 어지간한 세단 1대 가격에 맞먹는다. 일부 초고연산 위스키는 현대 그랜저 신형 프리미엄 세그먼트(3716만원)보다 비싸다.
그럼에도 출시하자마자 임자를 찾아간다. 지난해 1월 60년 숙성한 위스키 '더 글렌그란트 60년 데니스 말콤 애니버서리 에디션'을 선보인 트랜스베버리지는 전체 생산량 360병 가운데 29병을 우리나라에 들여왔다. 가격은 4000만원대였다. 결과는 매진이었다. 전량이 순식간에 다 팔렸다.
아영FBC가 올해 출시한 고든앤맥페일 밀튼 1949는 국내 정식으로 유통하는 위스키 가운데 두번째로 오래 숙성한 제품이다. 첫번째는 2021년 국내에 들여왔던 80년 묵은 세계 최고령 위스키 '제네레이션스 80′이다. 72년 숙성한 밀튼 1949는 국내에 단 3병이 들어왔지만, 1병은 국내에 들어오기도 전에 팔렸고 나머지도 들어오자 마자 동이 났다.
이렇게 초고연산 위스키가 수천만원대 가격에도 날개돋힌 듯 팔리자, 더 덩치가 큰 세계적인 주류 전문 기업들도 한국 시장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지난 24일 페르노리카코리아는 발렌타인 40년 마스터클래스 콜렉션(Ballantine's Masterclass Collection)을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선보였다.
이 제품은 전 세계에 108병만 나왔는데 우리나라에는 6병이 배정됐다. 본국 스코틀랜드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양이다. 가격은 2000만원대로 책정했다. 이 자리에는 발렌타인이 자랑하는 5대 마스터 블렌더 샌디 히슬롭이 직접 자리해 어떤 의도로 이 위스키를 한국 시장에 내놨는지 밝혔다.
히슬롭은 "일년 중 다른 나라를 찾는 기간은 4주 남짓이고, 나머지 기간은 거의 증류소에서 지낸다"면서도 "한국 소비자들이 발렌타인의 가치를 알아보고 인정해주기 때문에 상징적인 제품을 가장 먼저 선보여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페르노리카코리아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에 배정한 6병은 발매 당일 하루 만에 전량이 다 팔렸다. 페르노리카코리아는 현재 세관을 통과해 보관한 2병을 먼저 구매한 소비자에게 전달하고, 나머지 4병 역시 들어오는 대로 이어 전달할 예정이다.
지난달에는 글렌리벳, 맥캘란과 함께 소위 '3대 싱글몰트' 위스키로 꼽히는 글렌피딕이 40년과 50년 제품을 우리나라 시장에 동시에 선보였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주류 기업이 이렇게 희귀한 위스키를 줄줄이 내놓는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초고연산 위스키 시장을 전 세계에서 눈 여겨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글렌피딕을 수입·유통하는 윌리엄그랜트앤선즈코리아의 배대원 브랜드 앰배서더는 "이번에 선보인 제품에는 글렌피딕이 위스키를 통해 시간을 말하는 철학을 담았다"며 "글렌피딕은 위스키를 만드는 여러 요소 중에서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초고연산 위스키가 비싼 이유는 시간이 지날 수록 참나무통(캐스크·cask) 안에서 원액이 서서히 증발하기 때문이다. 위스키 원액은 다른 주류보다 알코올 도수가 특히 높다. 그만큼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속도가 빠르다. 위스키 원액이 참나무통 사이 미세한 틈으로 혹은 공기와 맞닿은 부분으로 서서히 기화하는 현상을 스코틀랜드에서는 '하늘의 천사에게 나눠준다'는 뜻에서 '천사의 몫(angel's share)'라 부른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보통 1년에 천사의 몫으로 2~3%가 날아간다고 추정한다. 40년 산이면 처음 원액을 넣었을 때에 비해 절반이 사라지고 50~60%만 남는다는 뜻이다. 50년산은 40~50%으로 줄어든다. 60년 숙성한 위스키는 3분의 2가 날아가고 오로지 3분의 1만 남는다.
여기에 최소 40년간 숙성하면서 들인 공간과 인건비에 대한 비용, 더 빠르게 출시했으면 거둘 수 있던 기회비용까지 합치면 초고연산 위스키 가격은 기하급수로 불어난다.
한국베버리지마스터협회 관계자는 "우리나라 위스키 시장이 커지면서 여러 유명 브랜드들이 들어와서 저마다 개성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 어떤 개성을 내세워도 '시간'이라는 객관적인 지표 앞에서는 설득력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라며 "단순히 비싼 술을 마신다는 차원에서 접근하기 보다, 살면서 두번 만나기 힘들 만큼 오래된 술을 마시는 경험 그 자체에 큰 돈을 쓰는 소비자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본인이 겪었던 그 시절의 빛바랜 기억 혹은 겪어보지 못했던 역사의 한 순간을 초고연산 위스키라는 술로 간접 체험하려는 수요가 상당하다는 의미다.
다만 초고연산 위스키가 객관적인 관능 검사 상으로도 정말 맛있는지 여부에 대해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일부 전문가들은 '초고연산 위스키에서는 30년산 이하 위스키들에서 느끼지 못했던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맛과 향이 뿜어져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학계에 따르면 대다수 주류 전문가들은 스카치 위스키를 기준으로 가장 맛있는 시점이 12~25년 정도라고 평가한다. 이 이상 넘어가면 참나무통에서 나는 나무 향이 위스키 원액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을 넘어서기 때문에 그저 '나무맛 술'이 되버린다는 것이 정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싱글몰트 위스키는 햇수가 오래될수록 맛있다고 생각하지.하지만 그렇지 않아.시간이 지나면서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거든.증류를 해서 더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덜 해지는 것도 있어.그건 다만 개성의 차이에 지나지 않아.무라카미 하루키 <위스키 성지 여행>, 라프로익 증류소 매니저 이안 헨더슨과 대화에서 발췌
초고연산 위스키를 내놓은 브랜드들은 '그래서 실력이 뛰어난 마스터 블렌더가 필요하다'고 반박한다.
마스터 블렌더란 위스키 맛과 향기를 정할 뿐 아니라 품질·생산·상품기획·전략수립까지 전부 아우르는 위스키 총괄 감독과 같은 자리다.
이들은 각 증류소가 보관한 수없이 많은 참나무통 가운데 초고연산 위스키를 만들기 가장 좋은 원액을 직접 선별하고, 여러 통에 든 제각기 다른 특색 원액을 섞어 매혹적인 최종 작품을 빚어낸다. 시간이 위스키를 잠재웠다면, 이 위스키를 다시 깨우는 역할은 마스터 블렌더의 몫인 셈이다.
2020년 물러난 전(前) 로얄 살루트 마스터 블렌더 콜린 스캇은 은퇴 이전 가진 인터뷰에서 "위스키도 사람처럼 전성기가 있다"며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깊어지고 연륜이 묻어나듯 위스키도 오래될 수록 향이 짙어지고 맛이 풍부해지지만, 너무 오래 숙성시키면 통의 풍미가 위스키 본연의 맛을 압도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