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들꽃이 흐드러진 들판과 수백년 전에 지었을 법한 고성(古城), 그 옆에 널따랗게 펼쳐진 포도밭과 그 한 귀퉁이의 주황색 지붕 농가. 더없이 평화로운 와이너리에서 따사로운 햇빛을 맞으며 수십년간 고이 눕혀놨던 와인을 마시는 삶.
꼭 와인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꿈꿔보는 장면이다. 이 꿈 같은 상상이 일상이 된다면 어떨까. 세계적인 와인 산지에서 올해 와이너리나 포도밭(vineyard) 딸린 저택 매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소규모 와이너리들이 팬데믹 이후 급격한 금리 상승, 그에 못지 않은 인건비 폭등으로 사업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탓이다. 상상했던 영화 속 와이너리 주인이 되는 꿈을 이루고 싶다면 지금이 적기다.
이들 와이너리를 잘 살펴보면 올해 2월 기준 서울 지역 아파트 평균 매매가 12억5000만원을 밑도는 곳도 수두룩하다. 우리나라에서 아파트 한 채 살 돈이면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유럽은 물론 미국과 아르헨티나 같은 전 세계 유명 와인 산지의 그림같은 저택 역시 살 수 있다.
대부분 와인 생산국은 외국인이 이런 부동산을 매입할 경우, 저개발 지역에 대한 투자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장기 거주 비자 신청이 가능하다. 만든 와인을 파는 영리 사업 역시 가능한 경우가 많다.
10일 세계적인 부동산 중개업체 새빌스와 경매사 소더비, 크리스티 등에 따르면 주요 와인 생산국가 와이너리 매물 시세는 점차 떨어지는 추세다.
프랑스에서도 최고 와인산지로 꼽히는 보르도 지역 한 와이너리는 지난해 호가(呼價)가 90만유로(약 12억5500만원)였지만, 올해 79만5000유로(약 11억원)로 12% 하락했다.
이 와이너리는 보르도에서도 좋은 와이너리가 즐비한 포이약(Paulillac) 지역에서 7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포이약은 샤토 라피트 로쉴드, 샤토 무통 로쉴드, 샤토 라투르 같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와인들이 나오는 지역이다. 이 매물에 딸린 포도밭은 5500평 남짓으로 그리 크지 않다. 대신 70평이 넘는 19세기 저택에 수영장, 최신 와인 양조 시설까지 갖추고 있다.
얼핏 말도 안될만큼 좋아 보이는 조건이지만, 실제로 저 매물을 사려 한다면 꼼꼼히 뜯어봐야 할 점이 많다. 와이너리 가치는 대체로 '얼마나 좋은 포도밭을 갖추고 있느냐'에서 온다. 밭고랑 하나, 계단 하나 높이 차이로도 포도 품질이 갈리는 와인 양조 세계에서 7킬로미터는 '완전히 다른 와인'이 나오는 지역으로 생각하는 편이 맞다.
프랑스 국립 원산지 호칭원(INAO) 규정에 따르면 위 매물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에는 샤토 라피트 로쉴드처럼 '포이약 와인'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없다. 이보다 훨씬 광범위한 지역을 뜻하는 '오 메독산(産) 와인'이라는 명칭만 붙일 수 있다.
이 두 지역 와인은 시장에서 가격 차이가 최대 수천배 이상 난다. 아무리 그럴 듯한 고건축물과 수영장 같은 시설을 갖추고 있다한들, 와이너리 본질인 포도밭 품질이 떨어지면 그만큼 제 값을 받기 어렵다는 뜻이다.
다만 널리 알려진 주요 산지에서 벗어나면 가격 대비 만족도가 훨씬 높은 매물을 찾을 수 있다. 마치 서울에서도 강남권과 마용성(마포·용산·성동) 지역을 벗어나 살짝 외곽으로 눈길을 돌리면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보석같은 집을 찾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와이너리 매물은 소더비나 크리스티 같은 세계적인 경매사 홈페이지, 혹은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 피가로가 제공하는 와이너리 매물 리스트를 통하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일부 국가 별로 특화한 사이트가 따로 있긴 하지만, 굵직한 매물들은 거의 이들 사이트에서 거래가 이뤄진다.
르 피가로에서 12억5000만원(약 95만달러) 이하 매물을 추려서 확인해보면 남프랑스 카르카손(Carcassonne)이라는 마을에 자리잡은 한 43만평 규모 와이너리가 56만달러(약 7억4000만원)에 올라와 있다. 한 사람이 도저히 관리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포도밭은 물론, 와인을 만들 수 있는 양조 시설과 19세기 말 지어진 120평 규모 석조 저택, 부동산 중개 수수료 모두를 포함한 금액이다.
담당 중개사는 "카르카손은 유럽에서 가장 큰 중세 도시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로 와이너리와 연계한 농촌 체험 관광에도 최적"이라고 덧붙였다.
프랑스는 '와인의 본산'으로 통하지만, 최근 몇년 동안 공급 과잉과 내수 부진이 이어지고 있다. 수백달러를 호가하는 고급 와인 시장은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건재하다. 그러나 이는 전체 프랑스 와이너리에서 나오는 와인 양에 비하면 상위 10%에도 못 미칠 만큼 일부에 불과하다.
내수 물량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머지 와인들은 만들어 놓고도 팔리지 않아서 공업용 알코올로 바뀌는 신세다. 프랑스 와인생산총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프랑스 슈퍼마켓에서 레드와인 판매는 15% 줄었다. 화이트와인과 로제와인 판매도 3~4% 떨어졌다.
제롬 데페 프랑스 농업경영자총연맹 사무총장은 "70년 전만 해도 프랑스인이 한 해 평균 소비하는 와인이 130리터 수준이었으나, 최근엔 한 해 40리터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밝혔다.
자연히 명성이 떨어지는 소규모 와이너리들은 줄줄이 문을 닫거나, 매각을 결정할 처지에 놓였다. 지금처럼 한꺼번에 많은 와이너리가 매물로 나오면 제 값을 받기도 쉽지 않다.
보르도 경영대학원 와인MBA 관계자는 "아시아권에서 와인 소비가 늘어나긴 했지만 프랑스와 유럽, 전 세계 최대 주류 소비시장 미국에서조차 구매력이 높은 젊은 층에서 와인 소비량이나, 와인 선호도는 점차 감소하고 있다"며 "남프랑스와 이탈리아 중부 와이너리들이 시설이나 관개(灌漑)에 비용이 많이 드는 와인 생산 대신 전원 풍경을 중심으로 한 숙박 사업으로 방향을 트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뿐 아니라 다른 지역 역시 주된 이유는 다를 지 언정 사정은 비슷하다.
미국 캘리포니아 일대 와이너리 평균 매매가는 팬데믹 이후 유동성(자금)이 대거 풀리면서 급격히 치솟았다. 그러나 동시에 매년 새로운 자연 재해가 찾아왔다. 2017년과 2020년에는 대형 산불이, 2021년에는 가뭄, 올해는 한파가 닥쳤다.
건조한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산불은 수시로 벌어지는 연례 행사에 가깝지만, 최근에는 무더위와 강풍, 가뭄과 맞물려 일대 와이너리에 전례없는 피해를 입혔다. 상품성으로 승부를 걸기 어려운 소규모 와이너리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운영을 포기하는 방안을 택하는 추세다.
아르헨티나와 칠레 주요 와인 생산 지역도 기후 변화로 인한 흉작, 대형 산불로 100년이 넘는 포도나무가 타버리는 재앙을 겪었다. 전 세계 와인 생산량 1위를 자랑하는 이탈리아마저 와인 생산 지역 인구 노령화로 인한 노동력 상실로 골치를 썩고 있다.
김지형 한양여대 외식산업과 교수는 "예상보다 저렴한 초기 투자 비용과 영화 같은 삶을 기대하고 충동적으로 해외 와이너리를 덜컥 샀다가는 오히려 오랫동안 해당 산업에 전념해 온 전문가마저 극복하지 못한 문제로 덤터기를 쓸 수도 있다"며 "버려진 와이너리를 살려내는 동화같은 이야기는 유명 와인 메이커조차 실현하기 어려우니, 관련 지식이 없다면 제반 사항을 충분히 살피는 주의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이어 "외국인 신분으로 와이너리 같은 부동산을 산다면 허가와 토지 준비, 현지 직원 고용 비용과 라이선스, 보험 같은 사업 수행에 필요한 비용도 미리 따져보고 전체 예산을 설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