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대에 가본 적이 있는가? 관동팔경의 하나이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2046호로 지정된 경포대는 경포 호수가 한 눈에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경포대의 정확한 위치는 강릉시 경포로 365다. 그러나, 강릉을 자주 간다는 사람들조차도 경포대는 정작 어디 있는 줄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강릉에 가면 경포 바다와 호수는 꼭 가지만, 경포대를 직접 찾는 이는 드물기 때문이다. 경포 호수를 한 눈에 감상하기로 경포대 만큼 좋은 장소가 없다. 경포대 자체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는데다 누각 앞이 훤히 트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경포대 누각에 오르면 경포 호수는 보이지만, 호텔같은 고층건물에 가려서인지 경포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경포대가 창건된 조선시대에는 경포대에서 바다가 보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전부터 내려오는 다음 얘기에 따르면, 바다가 보이지 않았을까도 싶다.
경포대에 오르면 다섯 개의 달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희고 선명한 하늘의 달
둘째는 아른거리는 경포호수의 달
셋째는 일렁이는 동녘 바다의 달
넷째는 술잔에 담긴 달
다섯째는 님의 눈에 비친 달이다.
‘경포대의 낭만’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시구가 있을까? 그런데, 최근 경포대의 여섯번째 달이 생겼다고 한다. 이번에 뜬 달은 술이다. ‘경포대의 뜨는 달’이란 이름의 막걸리다. 막걸리 이름이 ‘경포대의 뜨는 달’이라니, 너무 낭만적이지 않은가? 강릉의 신생양조장 정산농주에서 내놓은 신상품이다. 알코올 도수 13도, 아스파탐 같은 감미료를 일체 넣지 않은 프리미엄 막걸리다. 막걸리 발효 후 거의 물을 타지 않아, 약간 걸쭉하다. 한잔, 들이키면 곡물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런 단맛이 입 안을 가득 채운다.
정산농주 이석표 대표는 하이트진로 출신이다. 30여년을 맥주회사에서 경리, 회계, 영업 업무를 맡아 일했다. 2009년 퇴임 전부터 막걸리 양조장 차릴 궁리를 오랫동안 해왔다. 그러나, 실제로 양조장을 차린 것은 작년 8월에서야 가능했다.
“소규모 양조장을 차릴 수 있게 된 최근 주세법 개정 이전만 해도 막걸리 양조장 하나 차릴려면 30억원 가량의 설비투자가 필요했다. 엄두가 도저히 안났다. 무엇보다 30억을 투자해서 손익분기점을 맞출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어 기회가 왔다. 적은 비용으로도 양조장을 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설비와 운영자금 포함해 2억 가량을 투자해서 양조장을 차렸다. 한달에 1500병 정도 막걸리를 팔면 손익분기점은 겨우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재는 목표치의 절반 정도만 팔리고 있다. 한달에 700~800병 정도 판매하고 있다. 아직 일년도 안됐으니,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해볼 참이다.”
이석표 대표는 주류회사에서 평생을 일했지만, 정작 양조 경력은 전무하다. 술 생산과는 무관한 파트에서만 근무했기 때문이다. 현재 같이 일하고 있는 김도은 공장장 역시 티(차) 소믈리에 출신으로, 양조 전문가는 아니다. 한국가양주연구소 등 여러 전통주 교육기관에서 양조를 배운 김 공장장은 지금도 틈틈히 양조수업을 들으면서 이 대표와 함께, 상업용 술을 빚고 있다. 어떻게 보면 초보 양조자 2인이 신생 양조장을 꾸려나가고 있는 셈이다.
정산농주 막걸리는 현재 8도, 13도 2 종류가 있다. 8도는 ‘강릉 전통생막걸리’, 13도는 ‘경포대의 뜨는달’ 이름을 붙였다. 정산농주 막걸리는 삼양주다. 밑술에 2차례 덧술을 하는 술이다. 특이한 것은 밑술 전에 씨앗술을 만들어 이를 토대로 밑술을 만든다는 점이다. 씨앗술은 안정된 술 발효를 위한 작업이다. 멥쌀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되직한 죽을 만든 뒤, 누룩을 섞어 이틀간 발효한 술이다.
한국가양주연구소 류인수 소장은 씨앗술의 장점을 이렇게 말한다. “씨앗술은 전통주를 제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씨앗술이 술의 안정된 발효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술을 만드는 재료의 전체 비율에서 쌀과 물의 비율을 줄이고, 누룩의 양을 늘려 발효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효모의 안정된 배양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대량의 곡물과 물이 투입된 상태에서 누룩을 넣기보다 소량의 곡물과 물, 그리고 상대적으로 많은 양의 누룩을 넣으면, 누룩 안에 있는 야생 효모와 젖산균의 대량증식을 통해 안정된 술 빚기가 가능해진다.”
정산농주 막걸리들은 밑술 상태로 2~3일 지나면 1차 덧술을 추가로 넣는다. 멥쌀 고두밥이 1차 덧술이다. 3~5일 지나면 2차 덧술 시기. 이번엔 찹쌀 고두밥이다. 전체 발효기간은 21일 정도 걸린다. 발효가 끝나면 원하는 알코올 도수를 맞추기 위해 가수를 하고, 또 10일 정도 안정화 시기를 거친 뒤, 술을 거른다(제성). 대개는 제성기를 사용하지만, 술 양이 적으면 손으로 직접 짜기도 한다. 이렇게 완성된 술은 강릉 일대 하나로마트와 서울의 몇군데 바틀샵에 납품된다.
정산농주 양조장은 왜 이름에 ‘농주’를 넣었을까? 그리고 기본 도수를 흔한 6도가 아닌 8도로 했을까도 궁금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 막걸리 심부름을 곧잘 했다. 동네마다 신작로 한 모퉁이엔 어김없이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가게에서는 땅에 묻은 항아리에 술을 받아두었다가 주전자 들고 오는 손님에게 팔았다. 가게 주인이 어린 나에게 말해주었다. ‘이 술 도수가 8도’라고. 그래서 내게 오래전부터 ‘막걸리는 8도’라고 각인돼 있었다.
사실, 아주 옛날부터 농사 일을 하다가 새참으로 음식과 함께 마시는 농주는 쌀, 누룩, 물 외엔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았다. 도수가 8도 언저리였지만, 일체 감미료를 넣지 않았다. 가양주로 술을 빚던 시절이니, 감미료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나이 70이 다 돼서 막걸리 양조장을 차렸지만, 우리 선조들이 마셨던 농주 그맛을 그대로 재현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양조장 이름에 ‘농주’를 넣었고, 조선시대 농주 만들던 그 방식대로 막걸리를 빚고 있다.”
정산농주 막걸리들은 씨앗술 덕분에 발효는 잘되지만,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정산농주 막걸리는 초반에 신맛(산미)을 잡지 못해 곤욕을 치렀다. 특히, 8도 제품에 신맛이 도드라져, 판매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다행히 누룩에 문제가 있는 걸, 알게 돼 지금은 거의 안정화 단계에 이르렀다. 김도은 공장장의 말이다.
“초반에는 자가누룩을 썼다. 누룩을 직접 만든 걸 썼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맛이 심했다. 그래서 자가누룩을 공장누룩으로 바꿨더니, 산미가 많이 잡혔다. 사실, 신맛은 술을 즐기는 분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부러, 신맛 강한 술을 찾는 소비자들도 있다. 하지만, 초보자에게 신맛은 치명적이다. ‘상한 술’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최대한 신맛을 잡으려고 애쓰고 있다.”
전통술 중에 가장 어려운 술이 막걸리다. 누룩, 물, 곡물 품질 상태, 발효 당시의 온도와 습도 등 막걸리 술맛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만큼 예민한 술이 막걸리다. 정산농주 이석표 대표 역시 “양조장에 발효조(탱크)가 9개 있는데, 술을 빚다 보면 꼭 1개 통에서는 신맛이 도드라진 막걸리가 나온다”며 “똑같은 재료와 똑같은 조건으로 만들더라도, 맛이 일정하지 않은 게 막걸리”라고 말했다.
현재 정산농주에서 판매하고 있는 막걸리는 다행히 신맛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생산 과정에서 신맛 때문에 상품화하지 못하는 술이 지금도 더러 있다. 그러나, 정산농주는 타협할 줄 모른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신맛을 잡는 쉬운 방법이 있는데, 그걸 안한다는 것이다. 다소 단맛이 떨어지거나 신맛이 강한 막걸리라고 해도, 인공감미료를 일정량 넣으면 단맛이 강해져 신맛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효과가 생긴다. 공장형 막걸리를 만드는 양조장에서 대부분 쓰는 방법이다.
하지만, ‘무감미료 막걸리’를 차별화 포인트로 삼은 정산농주는 힘들더라도 쉬운 길을 가지는 않겠다는 생각이다. 이석표 대표는 “언제나 ‘신맛 리스크’는 무감미료 막걸리, 수제막걸리의 숙명과도 같다고 생각한다”며 “인위적으로 신맛을 잡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오로지 연구개발 노력을 통해서 신맛을 잡겠다’는 정산농주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