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나는 케이시가 마련해 놓은 몬테풀치아노의 레드 와인을 따서 크리스털 와인 잔에 따라 몇 잔을 마시고, 거실 소파에 앉아 막 사가지고 온 신간 소설을 읽었다. 케이시가 권한 것이 무색하지 않게 여간 맛이 좋은 와인이 아니었다.”
'렉싱턴의 유령' 무라카미 하루키, 1996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원숙기에 쓰여진 단편 문학의 정수 ‘렉싱턴의 유령’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단편은 미국 보스턴 교외 유서 깊은 마을 렉싱턴의 한 저택에 초대 받은 주인공이 며칠 간 이 저택에 머무는 동안 유령을 만난 일을 그렸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몬테풀치아노의 레드 와인’ 대명사가 아비뇨네지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다. 하루키는 평소 위스키와 재즈 매니아로 널리 알려졌다. 위스키 명산지 스코틀랜드 아일레이 섬과 아일랜드를 여행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이라는 책까지 썼다. 그런 그마저 ‘여간 맛이 좋다’며 빠져든 와인이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다.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라는 이름이 길고 복잡해 어려울 수 있다. 이 이름은 이탈리아어로 ‘몬테풀치아노 마을의 귀족적인 와인’을 뜻한다. 옛날부터 이탈리아 귀족은 물론 역대 교황들이 즐겨 마신 와인이라 이런 칭호가 붙었다.

그래픽=손민균

‘아비뇨네지(Avignonesi)’는 이 몬테풀치아노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와이너리로 꼽힌다. 이 와이너리 기원은 7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카톨릭 교회 흥망과 궤를 같이한다.

13세기 로마 가톨릭 교황권이 쇠퇴하자 1309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겼다. 소위 ‘아비뇽 유수’라 말하는 사건이다. 이후 수십년 간 아비뇽 시대가 이어지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 11세 시대가 되서야 교황청은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아비뇽 귀족 일부는 이 때 교황을 따라 로마에 새로 터를 일궜다. 이탈리아인들은 이들 귀족을 ‘아비뇽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아비뇨네지라 불렀다.

아비뇨네지 가운데 가장 큰 귀족 가문은 교황청 관리와 보호 하에 미사용 와인을 양조하며 세를 불렸다. 훗날 이 가문은 세 갈래로 흩어져 각각 로마와 시에나, 몬테풀치아노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중 몬테풀치아노 지역에 자리를 잡은 가문이 현재 ‘아비뇨네지’ 와이너리를 세웠다.

아비뇨네지 와이너리에서 내놓는 와인은 얼추 20여 종에 달한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와인은 ‘50&50′이다. 이 와인은 경쟁사가 만든 와인 절반에 아비뇨네지 와이너리에서 만든 와인으로 나머지 절반을 섞어 만들었다. 본인 와인에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여느 유럽 와이너리라면 시도하기 어려운 와인이다.

1988년 당시 아비뇨네지 오너였던 팔보 에토레 아비뇨네지는 이웃 한 카판넬레라는 와이너리 설립자 라파엘레 로세티와 함께 술을 마셨다. 카판넬레는 아비뇨네지보다 훨씬 후인 1972년에야 생긴 와이너리다. 두 사람은 와인 시장에서 보면 경쟁자였지만, 평소 동업자 정신을 발휘해 자주 만났다. 이 둘은 이날 거하게 취한 나머지 아비뇨네지에서 만든 메를로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과 카판넬레가 산지오베제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을 섞어 마시기 시작했다.

와인 생산자들 사이에서 이미 완성해 병에 담은 와인을 섞어 마시는 행위는 금기(禁忌)다. 와인은 포도 품종별 특성과 이 포도를 섞는 혼합 비율, 참나무통에서 숙성하는 정도처럼 와이너리가 가진 고유의 양조 노하우를 집약해 만든다. 특유의 향과 풍미도 여기서 나온다. 이렇게 개성이 강한 와인을 한데 섞어 버리면 이도 저도 아닌 괴작(怪作)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각자 만든 와인을 반씩 섞자 그 자리에서 놀라울 만큼 훌륭한 와인이 탄생했다. 그해부터 두 사람은 작황이 좋은 해에만 50&50 와인을 두 와이너리에서 동시에 2만 병씩 한정 생산한다. 이 이야기 덕에 50&50은 결합이나 화합 혹은 경쟁자와 협력을 통한 도약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유럽에서는 소규모 웨딩 와인으로 인기가 높다. 매해 연초마다 주 지어 열리는 신년회에도 단골 와인으로 등장한다. 다만 1병당 가격은 이탈리아 현지 기준 120유로(약 16만원), 국내 소비자가 기준 60만원을 호가해 쉽게 손이 가는 와인은 아니다.

아비뇨네지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는 50&50이 비싼 탓에 섣불리 손을 내밀지 못하는 소비자들을 위한 합리적인 대안이다. 이 와인은 국내 소비자가 기준 12만원으로 50&50에 비하면 5분의 1 값이다. 하지만 평단의 평가는 50&50 못지 않다. 토스카나 지역이 역사적인 풍년을 맞았던 2015년, 와인스크리틱의 라파엘 베키오네는 두 와인에 똑같이 93점을 줬다.

국내에서는 레뱅이 수입한다. 레뱅은 주류 수입사 레뱅드매일의 새 이름이다. 이 와인은 2022 대한민국주류대상 구대륙 레드 와인 10만원 이상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