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만한 아우가 없다지만, 종종 형과 비슷한 아우는 나타난다. 와인도 그렇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산지 프랑스 보르도에서 난 특급 와인들은 한 병 당 수백만원을 웃돈다. 어지간한 애호가나 부호가 아니고서야 소위 '5대 그랑크뤼' 와인이라 부르는 특급 와인들을 사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심지어 이들 와인은 가격이 해가 갈수록 뛰고 있다. 전 세계 금융시장에서 거래되는 프리미엄 와인 거래 가격을 지수화한 '리벡스 파인 와인 1000′ 인덱스는 2018년부터 2021년 사이 47%가 올랐다.
정신없이 뛰는 와인 가격이 야속한 일반 소비자에게 '아우'에 해당하는 세컨드(second) 와인은 가뭄 속 단비 같은 존재다. 세컨드 와인이란 수십~수백만원을 넘나드는 특급 와인 생산자들이 대표 와인과 다른 상표로 다소 저렴하게 내놓는 와인을 말한다.
와인을 만드는 포도는 농작물 특성 상 낱알 품질이 서로 다르다. 같은 나무, 심지어 같은 송이에서 자랐어도 매달린 위치에 따라 어느 부분은 햇빛을 충분히 받고 반대편은 과실이 덜 익기도 한다.
일조량 뿐 아니라 강우량 차이로 아랫지역 포도밭에서 거둔 포도 열매가 윗 지역에서 자란 포도 열매보다 물기를 많이 머금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포도를 따로 구별하지 않고 와인을 만들면 이전보다 묽거나 싱거운 와인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여러 수령 나무를 구역에 따라 심는 와이너리라면, 어린 포도나무에서 나온 열매보다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포도나무에서 나온 열매가 더 깊은 맛을 내는 경향이 있다.
고가품 브랜드가 엄선한 가죽으로 가방을 만들 듯, 와인 한 병 한 병에 집중하는 특급 와인 생산자들은 이처럼 기준에 다소 못 미치는 포도 알맹이를 모아 세컨드 와인을 만든다. 대신 품질 차이에 상응하는 가격을 책정해 엄격하게 대표 와인과 선을 긋는다.
가령 1일부터 이마트가 선보인 '에스프리 드 파비 2016′은 프랑스 보르도 생테밀리옹 지역 유명 와인 '샤토 파비'의 작은 동생 같은 와인이다.
샤토 파비는 올해를 기준으로 생테밀리옹 지역에 단 하나 남은 그랑크뤼급 와인 생산자다. 이 와이너리를 대표하는 와인 샤토 파비는 공격적이지만, 입에 착 달라붙는 과일향이 매력적이라 평론가 뿐 아니라 애호가들에게 두루 사랑을 받는다.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진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2003년산 샤토 파비에 "보르도산 과일 폭탄(Bordeaux fruit bomb)"이라는 평가와 함께 2014년 100점 만점에 99점을 줬다. 만점에 가까운 와인이라는 뜻이다.
이 와인 가격은 올해 12월 기준으로 평균 370달러(약 48만원)에 팔린다. 이마트에서 내놓은 에스프리 드 파비와 같은 2016년에 만든 샤토 파비는 조금 더 비싼 463달러(약 60만원)이다. 2016년산 포도로 만든 와인이 여러 평론가에게 여느 해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반면 이마트가 선보인 에스프리 드 파비 가격은 1병에 2만9800원이다. 같은 해 만든 큰 형 같은 와인에 비하면 20분의 1 정도다.
이 와인은 같은 소유주가 만들었다. 다만 대표 와인 샤토 파비와는 완전히 다른 밭에서 자란 포도를 사용했다. 포도를 품는 대지(大地)를 어머니에 비유한다면, 아빠는 같지만 엄마는 다른 와인이다.
샤토 파비는 생테밀리옹 지역에서도 가장 좋은 밭에서 자란 포도를, 에스프리 드 파비는 10킬로미터(km) 정도 떨어진 인근 코트 드 카스티용(Côtes de Castillon)에서 키운 포도를 쓴다. 다만 에스프리 드 파비도 15개월 동안 샤토 파비를 넣었던 참나무통에서 숙성해 훨씬 비싼 샤토 파비 느낌을 살렸다.
같은 세컨드 와인이라도 '어느 밭에서 자란 어떤 수준 포도를 사용했느냐' 여부에 따라 몸값은 크게 갈린다. 샤토 파비와 같은 포도밭에서 자랐지만, 어린 포도나무 열매로 만든 와인은 '아롬스 드 파비'라는 이름으로 따로 팔린다.
이 와인이 샤토 파비의 큰 동생이라면, 에스프리 드 파비는 엄밀히 말해 작은 동생이나 '서드(third) 와인'이라 할 만하다. 아롬스 드 파비는 가격도 작은 동생에 해당하는 에스프리 드 파비보다 3.5배 이상 높다.
그렇다고 세컨드 와인이 매번 해당 와이너리를 대표하는 와인보다 질이 떨어진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최근에는 품질이 떨어지는 포도로 세컨드 와인을 만드는 대신, 와이너리가 가진 고유의 개성이나 정체성을 유지한 '다른' 와인을 세컨드 와인으로 삼는 경우가 늘고 있다.
남는 포도나, 어린 수령 포도나무에서 자란 열매 대신 특성이 확실히 드러나는 밭뙈기에서 자란 포도만 사용해 일종의 '부띠끄 와인'을 만드는 식이다.
보르도 5대 그랑크뤼 와인 바로 밑자락에 속한 샤토 팔머는 '알터 에고(Alter Ego·또 다른 나)'라는 이름으로 세컨드 와인을 만든다. 이 와인은 대표 와인과 같은 포도를 쓰지만, 섞는 비중을 다르게 해서 세컨드 와인을 빚는다.
알터 에고는 샤토 팔머보다 매년 더 부드럽고, 신선한 과실향을 강조한다. 샤토 팔머는 이런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어린 포도나 덜 여문 포도를 세컨드 와인을 위해 미리 빼놓지 않는다. 대신 대표 와인을 만드는 포도 열매 가운데 알터 에고 성격을 잘 드러낼만한 밭에서 자란 포도를 따로 선정한다.
부드러운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세컨드 와인만을 위한 독자적인 와인 기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알터 에고는 참나무통에서 숙성하는 기한을 대표 와인 샤토 팔머보다 2개월 줄인다. 새 참나무통도 대표 와인 절반 수준만 사용한다. 남성적인 참나무통 향이 강하게 배지 않게 막고, 부드러움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일부 와이너리는 세컨드 와인이라는 표현이 순서를 강조하는 서수(序數)라는 점을 들어, 이런 와인에 주니어 와인(junior win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열등함보다 차이에 주목해 달라는 의도다.
경제 매체 포브스는 "패션 브랜드 미우미우(MIUMIU)가 처음에 프라다(Prada) 하위 브랜드로 시작했지만, 현재 프라다보다 과감한 시도를 하는 젊은 브랜드로 자리잡은 것처럼 세컨드 와인도 떨어지는 와인이라기 보다 다른 와인이라고 봐야 한다"고 했다.
와인업계에서는 세컨드 와인을 만드는 전통이 프랑스 보르도에서 시작했다는 주장을 정설로 여긴다. 그러나 최근에는 보르도와 비슷한 와인을 만드는 미국과 이탈리아 일대에서도 세컨드 와인이 부쩍 늘고 있다. 특히 생산량이 적은 미국산 특급 와인 브랜드의 세컨드 와인은 프랑스산 대표 와인 가격을 웃도는 경우가 잦다.
와인 전문가들은 세컨드 와인이 대체로 대표 와인보다 빨리 익고, 오래 묵히지 않아도 그 샤토가 가진 특징적인 맛과 향을 맛보기 좋다고 말한다. 잘 숙성한 와인이 가진 복합미는 즐기기 어려워도, 지금 바로 사서 마시기 에는 더 나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한국소믈리에협회 관계자는 "세컨드 와인은 간판 와인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퀄리티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마냥 접근성만 생각해 함부로 만들지 않는다"며 "유명 브랜드기 때문에 가격이 비쌀 거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그랑크뤼 수준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세컨드 와인은 비슷한 가격대 와인과 비교해 오히려 평론가 평점이 높은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