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졸레 누보는 그해 수확한 포도를 따서 와인을 빚어 바로 그해에 마시는 와인이다. 일반적인 와인과 달리 숙성을 거치지 않고, 발효 직후에 곧바로 마시는 이유는 포도품종 때문이다. 보졸레 누보의 원료인 가메이(Gamay) 포도는 오랜 숙성에는 적절하지 않은 포도 품종이다. 다만, 11월 셋째주 목요일에 전세계 동시에 출시한다는 마케팅으로 잘 알려진 와인이다. '빨리 생산해서 빨리 마셔야 하는 와인'이라는 보졸레 누보의 단점을 '그해에 수확한 포도로 바로 생산해서 가장 먼저 마시는 신선한 햇와인'이라는 역발상 마케팅으로 성공한 사례다.

요즘엔 한국에서도 별 인기 없는 보졸레 누보를 다시 소환한 것은 '누보 막걸리'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누보 막걸리, 햇막걸리란 그 해에 수확한 쌀로 빚은 신선한 막걸리를 말한다. 갓 수확한 쌀로 빚은 막걸리인 만큼, 수분 함량이 많아 쌀이 갖고 있는 다양한 향들이 막걸리에도 고스란히 배여 있다. 국순당에서도 해마다 햅쌀로 빚은 햇막걸리를 일시적으로 출시하고 있다.

누보 막걸리 이야기는 13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2009년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에선 희한한 '술 배틀'이 벌어진다. 프랑스에서 비행기로 공수해온 보졸레 누보 와인과 경기도 고양의 한 양조장에서 빚은 누보 막걸리 중 어떤 술이 더 많이 팔리는지 한달간 시합을 붙인 것이다.

배다리도가 박상빈 대표는 "고양시에서만 수확되는 가와지쌀은 우리나라 최고 품질의 쌀인 만큼, 그 쌀로 만든 명품 탁주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가와지 막걸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박순욱 기자

보졸레 누보 가격은 2만원대, 누보 막걸리는 4분의 1 수준인 5500원이었다. 그러나, 막상 비싸다는 지적을 받은 것은 보졸레 누보가 아닌 누보 막걸리였다. 당시 막걸리 한병 가격이 1000원 안팎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무슨 막걸리가 5000원이나 하냐?'는 지적을 받은 것은 당연하기도 했다. 그럼, 2만원이 넘는 보졸레 누보는? 2009년 그해만 해도 보졸레 누보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여서, 보졸레 누보 와인은 연말 특수까지 겹쳐, '가격을 따질 겨를 없이, 없어서 못파는 와인'이었다.

그렇다면 그해 연말 보졸레 누보와 누보 막걸리 중 어떤 술이 더 많이 팔렸을까? 놀랍게도 누보 막걸리 한달 판매량이 보졸레 누보 한달 판매량을 앞섰다. 이벤트를 기획한 백화점 관계자도 뜻밖의 결과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2009년 보졸레 누보를 누른 햇막걸리를 만든 주역은, 지난 4월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가좌동에 소규모양조장 '배다리도가'를 설립한 박상빈 대표다. 2009년 누보 막걸리를 만들었을 때, 그는 고양탁주 이사로 근무했었다.

박 대표는 고양시에서만 수확되는 가와지쌀, 그것도 햅쌀로만 '가와지 막걸리'를 내놓고 있다. 10여년전 보졸레 누보를 눌렀을 때, 그대로 햅쌀로 신선한 막걸리를 만들고 있을 뿐 아니라, 이번엔 고양시 특화농산물인 가와지쌀로만 막걸리를 빚는다. 2009년 당시에 내놓은 누보 막걸리보다 훨씬 고급 술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그 술이 배다리도가의 '가와지 막걸리'다.

가와지쌀은 한반도 최초의 재배 볍씨에서 이름을 땄다. 1991년 일산 신도시 개발이 한창이던 고양시 대화동 일대 가와지 마을에서 볍씨가 발굴됐다. 마을의 이름을 딴 가와지 볍씨는 5020년 전 한반도 최초의 재배 볍씨로 측정됐으며, 신석기 시대 한강 농경 문화권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이뤄졌음을 증명하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받는다.

고양시는 가와지볍씨 출토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2017년 경기도 농업기술원의 기술지도를 받아, 가와지쌀을 개발했다. 지난해에만 약 1000톤의 가와지쌀이 고양 일대에서 생산됐다.

고향인 고양에서만 수확되는 가와지쌀에 대한 박 대표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가와지쌀은 찹쌀과 멥쌀의 중간 찰기로 쫀득한 식감을 자랑합니다. 쌀알이 작아서 조리 시간도 짧고, 김밥, 도시락에 활용하기도 좋습니다. 옛부터 '밥으로 먹기 좋은 쌀로 빚은 술은, 술맛도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찰기 많은 가와지쌀로 빚은 술은, 감미료를 전혀 넣지 않고도 자연의 단맛이 일품입니다."

그러나, 가와지쌀은 양조장 입장에서 볼 때 술빚기 쉬운 쌀은 아니다. 가격이 일반쌀보다 비싼데다 쌀 알갱이도 작다. 막걸리 빚는데 핵심원료인 전분은 쌀 알갱이에 다 들어있다. 그런데, 알갱이가 작다는 것은 그만큼 전분이 적다는 뜻으로, 한마디로 수율(생산성)이 높지 않다는 의미다.

그뿐 아니다. 가와지 쌀로 술 빚기는 극도의 신중함이 필요하다. 쌀 알갱이가 작은 만큼, 쌀 세척도 조심스럽다. 박 대표는 대개 쌀 씻기를 15회 정도 하는데, 갓난 애기 목욕하듯이 조심스레 쌀을 씻는다. 거칠게 씻다보면 가뜩이나 작은 쌀 알갱이가 훨씬 작아지기 때문이다. 쌀 씻기를 살살, 천천히 하다보니 세척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30kg 쌀을 한번 씻는데 1시간 남짓 걸린다.

쌀 씻기 다음은 침미, 쌀 불리기다. 침미 작업 역시, 가와지쌀은 여느 쌀과는 다르다. 오래 불린 다음에 고두밥을 지으면, 쌀 알갱이의 힘이 없어져, 꼬들꼬들한 느낌이 약해진다. 그래서 2시간 정도만 쌀 불리기를 한다.

배다리도가 박상빈 대표와 아들 건형씨가 고두밥을 식히고 있다. 가와지 막걸리는 밑술에 두번 덧술하는 삼양주다. /박순욱 기자

교반(발효 중인 술을 고루 섞기)도 쉽지 않다. 원료인 가와지쌀은 찰기가 많아, 발효탱크 안의 술이 금방 딱딱해진다. 이럴 때는, 부지런히 술을 저어줘야 한다. 하지만, 떡처럼 딱딱해진 술통을 휘젓는게 여간 어렵지 않다. 성인 남자도 두 팔을 모아서야 겨우 저을 수 있는데다, 금새 땀이 날 정도로 힘이 부친다. 그런데 이곳 배다리도가 양조장에는 자동교반기가 없다. 박 대표를 비롯해 두 아들까지 '삼부자'가 돌아가며 술통을 젓는다. 여간 힘이 들어가는 작업이 아니다. 박 대표는 "자동교반기를 써봤는데, 생각보다 교반이 잘 안되는 것 같아서, 직접 팔로 젓고 있다"며 "젊은 아들 둘이 큰 불평 없이 잘 한다"고 말했다.

가와지 막걸리는 삼양주다. 밑술을 하고 나서 두번의 덧술을 한다는 얘기다. 밑술 후에 48시간 즈음 지나면 1차 덧술을 넣어줘야 한다. 2차 덧술 역시 1차 덧술과 마찬가지다. 가와지쌀은 당화력이 빠르고 그리 오래 가지 않아 효모 증식기가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라 밑술과 덧술 사이 시간이 짧다. 말하자면 덧술을 빨리 하는 셈이다.

하지만, 효모 증식을 늘리기 위해 여타 보조제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 박상빈 대표는 "순수 발효기법으로 술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흔히 넣는 정제효소 같은 첨가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가와지 막걸리는 총 발효기간이 9일 정도 걸린다. 이후 술을 거르고 나서 냉장저온창고에서 2~3일간 숙성을 거친 뒤에 병입한다. 현재 가와지 막걸리는 2종. 7.5도는 500ml에 4500원, 9.5도는 450ml에 8000원이 소비자가격이다. 지역특산주 면허가 아니기 때문에, 온라인 판매는 안돼 지역 소매업장이나 전통주점을 통해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배다리도가 대표상품 가와지 막걸리. 고양시 특화 농산물인 가와지 햅쌀로 만들었다. /배다리도가 제공

가와지 막걸리에 대한 전통주 전문가들의 시음 평도 호의적이다. 대동여주도 이지민 대표는 "곡류의 담백한 향이 기본으로 깔리고, 바닐라와 같은 향도 담겨 있다"고 평했으며, 한국식품연구원 김재호 책임연구원은 "탁주에 한정하여 평가하지 않아도 괜찮으리만큼 잘 빚은 술이며, 드라이하면서도 혀의 감각을 자극하는 다양한 맛이 존재한다"고 시음기를 남겼다.

가와지 막걸리의 또 하나의 특징은 '떼루아(terroir) 막걸리'라는 점이다. 떼루아는 프랑스어로 토양, 풍토를 뜻하는 단어로 대개 와인이 만들어지는 자연, 양조환경을 말한다. 가와지 막걸리는 고양시에서만 수확되는 가와지쌀로만 만든다. 술 맛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다른 지역에서 난 쌀이 전혀 들어가지 않아, 다른 양조장 술과는 이런 점에서 확연히 다르다. 현재 인공감미료 같은 첨가물을 넣지 않으면서 가와지쌀로 만드는 막걸리는 배다리도가의 가와지막걸리가 유일하다. 박 대표는 "다양한 쌀막걸리 중 곡향의 차이는 미세하다고 본다"며 "가와지 막걸리의 참된 가치는 지역성(떼루아)에 있다"고 말했다.

가와지 막걸리를 만드는 배다리도가 3부자. 왼쪽이 큰아들 재형, 중간이 박상빈 대표, 오른쪽이 둘째 아들 건형씨. /배다리도가 제공

배다리도가의 또다른 이름은 '삼부자 막걸리'다. 박 대표가 나이 60을 바라보면서 양조장을 새로 창업한다는 것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박상빈 대표 집안은 대대로 양조장을 해왔다. 고조할아버지부터 아버지 대까지 4대를 이어온 양조장은 1975년 인근의 다른 양조장들과 합쳐, 고양탁주합동제조장으로 통합됐다. 그래서 '5대' 박 대표는 고양탁주와는 별개로 올 초에 두 아들 재형, 건형씨와 함께 소규모양조장 배다리도가를 설립, 무첨가 막걸리를 만들고 있다. 박 대표는 "아들들 도움 없이 혼자서는 도저히 양조장을 차릴 엄두가 나지 않아, 직장을 다니고 있는 두 아들에게 '양조장을 같이 하자'고 오랫동안 설득한 끝에 겨우 양조장을 차리게 됐다"고 말했다.

신생 소규모 양조장인 배다리도가는 현재 지역특산주 면허 취득을 준비 중이다. 그래야만, 인터넷 판매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가와지 막걸리' 후속 제품으로 '일산 막걸리'도 곧 내놓을 참이다. 쌀 외에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을 부재료로 사용할 작정이다. 약주 면허도 있는 만큼, 증류식 소주를 발효 중인 약주에 섞어 완성하는 과하주도 개발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생산량이 많지 않지만, 제품의 종류는 가급적 다양하게 갖출 방침"이라고 말했다. '다품종 소량 생산' 체제로 가겠다는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