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이츠로 시킨 치킨 너무 맛있다'
지난달 재벌가 가족 A씨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사진 한장을 올렸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평범한 프랜차이즈 치킨과 와인을 함께 먹고 마시는 사진이었다. 그저 한 번 쓱 보고 지나칠 만한 저녁 자리였다.
그러나 이 사진에 일부 와인 애호가들은 열광했다. 대충 놓여진 치킨 박스 뒤로 보이는 와인 세 병이 모두 국내에서는 눈 씻고 찾아 볼래야 찾아보기 어려운 보석같은 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한 자리에서 찍힌 도멘 로마네꽁티(DRC) 로마네 생비방 1991년산과 도멘 하모네(Domaine Ramonet)의 몽라셰 그랑 크뤼(Montrachet Grand Cru) 2011년산, 스크리밍 이글(Screaming Eagle)은 모두 최고 수천만원에서 최소 수백만원을 호가한다.
로마네꽁티는 수십년 동안 전 세계 최고가 와인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프랑스 와인이다. 1991년산 가격은 현재 국제 시장에서 2만3000달러(약 3320만원)선에 거래된다. 국내에서는 관세를 포함해 2017년산이 올해 8월에 7900만원에 팔렸다. 이보다 26년이나 오래 숙성한 1991년산은 세금을 포함한 국내 판매가가 이보다 훨씬 비쌀 가능성이 크다.
도멘 하모네 몽라셰 역시 백(白)포도주 가운데 비싸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와인이다. 이 2011년산 와인은 현재 4000달러(약 580만원)에 팔린다. 국내 소매 판매가는 1000만원에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스크리밍 이글은 좋은 와인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미국 나파(Napa) 밸리 지역에서도 가장 몸값이 비싸다. 해외 평균가는 5000달러(약 720만원) 정도다. 매년 약 600상자(약 7200병) 정도만 만들다 보니 희소 가치가 유난히 높다. 이 와인을 사려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차례가 오면 우편으로 통보를 하는데, 아무리 빨라도 12년 정도는 걸린다는 게 통설이다. 어렵사리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도 1인당 매년 3병까지만 살 수 있다. 이 때문에 일반 소비자들은 대부분 경매에서나 스크리밍 이글을 한 두병 만날 수 있다. 워낙 매물이 적다 보니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다.
국내에서 이런 희귀 와인을 한 자리에서 만나기란 최고급 레스토랑이나 특급 호텔 바에서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애초에 재고를 남길 만큼 시장에 풀린 물량이 많은 와인이 아닐 뿐 더러, 와인 리스트에 올려놔도 살 수 있는 소비자가 극히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A씨는 사진 속에 이 와인을 마신 곳에 대한 작은 힌트를 남겼다. A씨가 사진에 남긴 링크를 따라가면 최근 서울 광화문 인근에 문을 연 와인 판매점이 나온다. '엘레망(Elements)'이라는 곳이다.
이 곳을 직접 찾아가 보면 겉모습은 다른 와인 판매점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엘레망은 빌딩 1층과 지하를 연결하는 한 켠에 호젓하게 자리 잡고 있다.
다소 공간이 넓다는 느낌이 들 뿐이다. 진열한 와인 가격이 딱히 높은 것도 아니다. 편하게 마실 수 있는 3만원 이하 와인부터, 선물하기 좋은 수십만원대 와인까지 두루 전시했다. 대부분 와인 가격은 소규모 와인 판매점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다.
그러나 매장 한편에 검은 색으로 따로 마련한 '파인 와인 존(Fine wine zone)'에 이르면 새로운 모습이 펼쳐진다. 이 구역에는 A씨가 마셨던 고가 희귀 와인 수백병이 즐비하다.
이 구역 와인들은 일반 소비자는 살 수 없다. 오로지 멤버십 회원들 몫이다. 이들 와인 가운데 상당수는 일반 와인 수입사를 통하지 않고, 엘레망이 해외에서 바로 들여온다. 그만큼 와인 유통 과정이 투명하고, 일반적인 방법으로 구하기 어려운 와인을 다양하게 갖췄다.
엘레망 멤버십 가입비는 1년에 1100만원이다. 멤버십에 가입하면 파인 와인 존에서 희귀 와인을 산 후 매장에 마련한 특별 프라이빗 룸(private room)에서 바로 마실 수 있다. 이 공간 이용료는 5시간에 55만원이다. 이용료는 가입비에서 차감한다.
특별 공간에서 와인을 열면, 엘레망 소믈리에가 직접 와인 상태를 확인하고 서빙을 해준다. 와인을 따르는 잔은 장인이 손으로 만든 오스트리아 고급 브랜드 잘토(Zalto)와 리델(Riedel)로 제공한다.
이들 브랜드는 와인 특성에 맞춰 잔을 디자인하기 때문에 집에서 마실 때 느끼기 어려웠던 와인의 숨은 맛과 향까지 속속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 주장이다.
공간 이용은 연간 최대 4번으로 제한한다. 가입비 1100만원에서 4번에 대한 이용료 220만원을 뺀 나머지 880만원은 가입 이후 1년 동안 엘레망에서 와인을 살 때 현금처럼 쓸 수 있다. 1100만원을 온전히 회수할 수 없는 매몰 비용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선불금으로 끌어다 쓰는 개념이다.
물론 와인을 매년 1000만원씩 사지 않는 소비자라면 목돈을 지불하는 멤버십 가입을 망설일 수 있다. 하지만 매달 와인 구입 금액이 75만원을 넘어가는 소비자에게 '도심에서, 구하기 힘든 희귀 와인을, 완벽한 서비스와 함께 산 자리에서 곧바로 즐길 수 있다'는 제안은 매력적일 가능성이 크다.
엘레망 관계자는 "멤버십 가입자에게는 오래된 와인이나, 구하기 어려운 와인이 들어오면 구매 우선권을 주고 있다"며 "법인은 관계자 최대 3명까지 한 멤버십 계정을 이용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느껴진다는 소비자도 있다"고 말했다.
고가 멤버십을 기반으로 운영하는 와인 바는 2000년대 초반에도 성행했다. 1992년 멤버십 와인 바로 문을 연 이태원 더 젤(The Jell)은 대표적인 국내 1세대 멤버십 와인 바다.
강남권에서는 도산공원 사거리부터 압구정 로데오로 이어지는 길목에 아예 간판 없이 전화번호 만으로 알음알음 운영하는 와인 바가 많았다. 일부 멤버십 와인 바들은 우리나라 와인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이전이라는 점을 노려 기본 술값을 터무니 없이 높게 잡기도 했다.
한국주류수입협회 관계자는 "클럽이나 라운지처럼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을 싫어하는 연예인, 재벌가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다 보니 그때도 멤버십 와인 바들은 전용 엘리베이터를 따로 설치한 곳이 많았다"며 "지금과 다르게 와인 수입가를 정확히 알기 어렵다 보니 입고가보다 10배 넘게 비싼 값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곳들은 2012년 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상당수 자취를 감췄다. 씀씀이가 큰 일부 소비자만 상대하는 멤버십 위주 경영 방식으로는 경기 위축에 대응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들 멤버십 바는 회원 수가 줄면, 인지도와 가격 경쟁력 면에서 뒤늦게 라도 일반 소비자를 끌어 들이기가 힘들다. 목돈으로 받은 멤버십 가입비나 회비는 보통 바 수준에 걸맞는 고가 와인을 사들이는 데 쓰기 때문에 회원이 줄어들면 자금 회전에도 큰 타격을 입는다.
우리나라 와인 시장이 고도화되고 와인 애호가가 늘어나는 과정에서 일부 유명 멤버십 바들은 이 제도를 포기했다. 더 젤 역시 2012년부터 문턱을 낮추고 일반 소비자를 받기 시작했다.
여전히 청담동 일대에서 멤버십 제도를 유지하는 와인 바는 대교그룹 자회사 크리스탈와인컬렉션이 운영하는 레 끌레 드 크리스탈 정도다. 이 곳도 연간 100만원을 회비로 내거나, 1000만원을 선금으로 맡긴 후 2년 동안 차감하는 형태로 운영한다.
최근에는 롯데호텔이 롯데월드타워 107층에 자리잡은 '시그니엘클럽'을 이용할 수 있는 멤버십을 선보였다. 시그니엘클럽은 엄밀히 말하면 와인 바만을 위한 멤버십은 아니다.
매년 연회비 350만원을 내면 중식(中食) 코스요리, 초밥을 제공하는 멤버십 레스토랑, 와인과 위스키·코냑을 갖춘 바를 동시에 쓸 수 있다.
롯데호텔 관계자는 "코키지 프리(corkage free·손님이 술을 가져가도 별도의 비용을 받지 않는 서비스)에 모든 주류와 음료를 20% 할인해주기 때문에 이곳을 자주 찾는 분이라면 멤버십 비용을 충분히 거둘 수 있다"며 "107층에서 서울 야경을 바라볼 수 있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장소를 언제든 찾을 수 있다는 장점도 상당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