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 뒤에는 그에 걸맞는 제작자가 있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 노래를 부른 가수만 기억한다.
올해 주류(酒類) 시장 최대 히트 상품 원소주도 그렇다. 열에 아홉은 인기 가수 박재범을 원소주의 아버지로 생각한다.
하지만 원소주를 '키운' 아버지 박재범 뒤에는 원소주를 '낳은' 아버지 김희준 원스피리츠 프로젝트 매니저(PM)가 함께 서있다.
25일 서울 신사동 원스피리츠 새 사옥에서 김희준 매니저를 만났다. 김 매니저는 원소주가 세상에 나오기 2년 전인 2020년 박재범 원스피리츠 대표를 만났다.
이후 초기 기획부터 제품 출시, 판매, 홍보에 이르기까지 원소주에 관한 모든 일을 총괄하고 있다.
원소주는 지난달까지 공유 오피스 위워크에 머물다, 이달 초 가로수길 4층 건물로 사무실을 옮겼다. 새 사옥 내외부는 인테리어를 위해 오가는 작업자로 분주했다.
마치 소주병을 돌려 따듯, 원소주 뚜껑을 본 따 만든 손잡이를 돌려 실내로 들어서자 기와 수천장을 쌓아 다리를 만든 바(Bar) 테이블이 눈길을 사로 잡았다. 천장에는 선비들이 쓰던 갓처럼 생긴 조명이 불을 밝혔다.
"저녁에는 저쪽에 실제 자개로 만든 큰 회의 테이블이 들어오기로 했습니다. 여기가 외국에서 손님들이 오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공간이라 외국인이 봤을 때는 굉장히 전통적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는 힙(hip)한 느낌을 주는 곳으로 꾸미고 싶었어요."
김 매니저는 첫 마디부터 전통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우리나라 전통 소주는 원소주 같은 증류식으로 만든다. 쌀을 발효해서 밑술을 만들고, 이 밑술을 정제해 맑은 술을 뽑아내는 방식이다.
증류식 소주는 효모가 생성하는 향 성분이 살아 있어 원재료 특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대신 그만큼 제조 공정이 복잡하고, 섬세한 양조 기술이 필요하다.
반면 희석식 소주는 무색·무취·무미한 주정에 감미료를 더해 만든다. 훨씬 저렴하고 대량으로 만들기 좋다. 하지만 마시는 온도를 적절히 조절하지 않으면 알코올 향이 강하게 나기 쉽다.
"평소에 아벨라워, 라가불린 같은 스카치 위스키나 버번 위스키 메이커스 마크, 헨드릭스 진 같은 증류주를 자주 마십니다.이런 술들은 냉장고에 넣지 않고 보통 실온에서 바로 마시잖아요? 소주도 제대로 만들면 이렇게 마실 수 있다, 알코올 향보다 더 좋은 향이 나는 소주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김 매니저는 원하던 소주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한 주류 박람회에서는 1시간 반 동안 200개가 넘는 전통주를 맛봤다.
그리고 충청북도 충주에서 '고헌정'이라는 양조장을 만났다. 고헌정은 감압식 증류 방식으로 소주를 만든다. 감압식은 술을 끓이는 증류기 압력을 대기압보다 낮게 하는 양조 방법이다.
이 방식을 쓰면 50도 정도 온도에서 알코올 성분이 빠르게 날아가기 때문에 술에 누룩 향이 세게 배지 않는다. 은은한 누룩 향과 부드러운 목넘김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김 매니저는 이 술을 같은 충주 '담을 술공방'이 제작한 옹기에 담아 다른 증류식 소주와 차별화했다.
"우리 쌀로 만든 우리 술만의 하얀 색, 투명함, 깔끔함을 원소주의 정체성으로 가져가고 싶었어요. 우리나라 뿐 아니라 누룩 향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에게도 '소주의 매력이 바로 이런 거야' 하고 권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이 제품은 김 매니저 바람대로 발매하자 마자 소주 역사를 새로 썼다. 초기 생산물량 2만병은 일주일 만에 동이 났다.
1병당 1만4900원이라는 가격에도 매장 앞에는 매일 '오픈런(영업 시작 전부터 줄지어 대기하는 행위)' 행렬이 이어졌다. 인파가 너무 몰려 애초 1인당 12병이었던 구매 한도를 4병으로 줄일 정도였다.
김 매니저는 "박재범이 만든 술이라는 배경이 있으니 어느 정도 팔릴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한 번에 다 팔 수 있다는 기대는 솔직히 하지 않았다"며 "초기 사업 계획서를 보면 올해 12월까지 1차 판매 목표를 2만병으로 세웠는데, 일주일 만에 2만병이 다 팔렸다"고 말했다.
일시적일 줄 알았던 원소주 '열풍'은 이후 '원소주 현상(現象)'으로 굳어졌다. 옹기에서 술을 익히는 보름을 기다려서는 생산량을 맞추기 어려워졌다. 옹기 숙성 기간을 생략한 후속 제품 '원소주 스피릿'은 이렇게 나왔다. 김 매니저는 이 제품을 편의점 GS25에서 독점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첫 제품이 성공하니까 여러 판매 채널에서 먼저 손을 잡자면서 좋은 제안을 했습니다. 그래도 저와 박재범 대표는 무조건 편의점 한 곳에서만 원소주를 팔아야 한다고 했어요. 이건 우리가 세운 원칙이었습니다. 딱 한 군데랑 일해야 그쪽에서도 가지고 있는 모든 소스를 다 쏟아 붓습니다."
일부 경영진은 '다른 소주보다 값이 10배가 비싼 프리미엄 제품인데 왜 백화점이 아니라, 편의점에서 팔 생각을 하냐'고 반대했다.
"전국적으로 한번에 이슈몰이를 하려면 편의점 만한 데가 없습니다.또 프리미엄이라는 가치를 가격이나 특정 공간에 붙이는 것도 원소주와 맞지 않았습니다. MZ세대는 편의점을 본인들 문화에 맞춰서 바꿔 나가고 있잖아요.'우리 제품을 놓는 그 편의점, 원소주를 진열한 바로 그 자리가 프리미엄이라 불리게 만들자'는 취지로 계속 편의점을 고집했습니다."
GS25에 따르면 '원소주 스피릿'은 7월 발매 이후 지난달까지 전체 주류 가운데 줄곧 매출 순위 1위를 기록했다. 이 제품 역시 출시 1주일 만에 초도 물량 20만 병이 모두 팔렸다.
출시 석 달째를 맞은 지난 11일 기준 누적 판매량은 200만병, 매출액은 260억원을 넘어섰다. 김 매니저 예상보다 100배 많은 양이다.
가장 최근 나온 '원소주 클래식'은 앞선 두 술과 달리 상압식 증류법으로 만들었다. 이 방식은 대기압과 같은 압력으로 술을 정제해 짙고 깊은 누룩 향을 강조했다. 도수도 28도로 22도인 원소주, 24도인 원소주 스피릿보다 높다.
김 매니저는 "내년 초에 알코올 도수를 45도까지 높인 제품이 나온다"며 "위스키나 고량주와도 경쟁할 만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소주 시장 규모는 희석식 소주와 증류식 소주를 모두 합쳐 3조원 정도다. 이 가운데 증류식 소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0년 440억원, 지난해 650억원에 그쳤다.
올해는 지난 2월부터 이 시장에 합류한 원소주 매출액을 합쳐 1000억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2조9000억원에 달하는 희석식 소주에 비하면 미미하다. 고작 3.3% 정도다.
그러나 우리보다 증류식 소주 시장이 먼저 발달한 일본 사례를 보면 증류식 소주인 '을류소주(乙類燒酎·오츠루이쇼추)' 판매량은 1인당 평균 국민소득(GDP)이 3만5000달러를 넘어선 2004년을 기점으로 희석식 소주에 해당하는 '갑류소주(甲類燒酎·고루이쇼추)' 판매량을 넘어섰다.
김 매니저는 증류식 소주 수요가 장기적으로 꾸준히 늘어난다는 계산에 맞춰 공장 증설과 신설을 준비 중이다. 현재 강원도와 함께 적당한 새 공장 부지를 알아보고 있다.
예정대로 증설과 신설이 이뤄지면 올해 연말까지 생산량은 270만병까지 늘어난다. 이 생산량을 감안해 최근 원주농협과 쌀 5200톤 수매 계약을 마쳤다.
"5200톤을 계약했지만, 생산량에 따라 쌀을 1만톤까지도 쓸 것 같습니다. 원소주에 쓰는 토토미라는 쌀이 '삼광'이라는 품종인데, 온전히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쌀입니다. 우리는 우리 쌀로 우리 술을 빚는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앞으로도 양조용 쌀이 우리나라에서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김 매니저는 "올해 1~9월까지 매출이 200억원 정도인데, 12월까지 따지면 300억원은 기록할 것 같다"며 "내년에는 연 매출 1000억원을 찍고 예비 유니콘(기업 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 심사를 받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기업공개(IPO) 여부에 대해서는 "투자 제안이 많이 오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급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원소주는 내년 2분기부터 수출을 시작한다. 첫 목적지는 박재범 대표가 나고 자란 미국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 주류 소비 시장이기도 하다.
"이전에 소주를 미국에서 판다고 하면 일단 한인마트나 한인 레스토랑부터 찾아갔습니다. 우리는 이런 곳보다 재밌는 제안을 하는 곳부터 찾아가려 합니다.'술을 파는 게 아니라 문화를 판다'는 생각으로 외국인들에게 '한식과 한국 술이 이렇게 맛있고 멋있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마케팅 방법을 고민 중이에요.미쉐린가이드에서 2스타를 받은 뉴욕 아토믹스 같은 한식 레스토랑에서 팝업 다이닝을 열거나, 박재범과 함께하는 원소주 월드투어 공연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김 매니저는 해외에서 소주가 칵테일 베이스로 쓰인다는 점을 감안해 원소주 맛을 살릴 수 있는 칵테일 레시피를 널리 알리고 있다.
전통주를 이용한 칵테일로 유명한 서촌 바 '참', 김치 칵테일 같은 독특한 메뉴를 선보이는 압구정 '파인앤코'는 싱가포르에서 곧 열리는 게스트 바텐딩 행사에 원소주를 사용하기로 했다.
김 매니저는 "기획 단계부터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는 도화지 같은 느낌의 술, 즐기는 사람에 따라 끝없는 확장성을 가진 술을 만들고 싶었다"며 "술이 주연인 자리도 있지만, 우리가 만드는 소주는 다양한 음식을 돋보이게 하는 멋진 조연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원소주는 소주를 모르는 외국인에게는 낯설어서 새로운 술이다. 동시에 소주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우리나라 주당(酒黨)들에게는 분명 낯익은 소주인데 남 달라서 새로운 술이다.
김 매니저는 이르면 다음 달부터 음식과 술을 함께 즐기는 우리나라 소비자를 겨냥해 국내 유통 채널에 변화를 줄 예정이다.
그는 "곧 GS25 뿐 아니라 엄선한 레스토랑과 바에서 원소주를 만날 수 있다"며 "여러 레스토랑에서 한꺼번에 원소주를 판매할 순 없겠지만, 맛과 멋이 우리와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곳 위주로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원소주가 증류식 소주 소비자 층을 새로 여는 데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너무 독하다' '소주가 왜 이렇게 비싸냐'고 지적하는 안티 팬 역시 존재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이런 비판들을 넘어서려면 국내에서 잘해낸 것처럼 해외에서도 성공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원소주가 외국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 소주라는 평가를 받으면 '소주계 BTS' '소주계 손흥민'처럼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힘을 실어줘야 하는 존재로 거듭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