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졸레 누보’. 와인에 전혀 관심이 없는 소비자일지라도 한번 쯤 들어봤을 법한 말이다. 한때 매년 이맘때면 여러 매체들이 보졸레 누보를 마실 때가 왔다고 분위기를 띄웠다.

보졸레 누보는 프랑스 보졸레 지역에서 매년 9월 초에 수확한 포도를 숙성해 11월 셋째 주 목요일 그해 가장 먼저 선보이는 햇 와인(뱅 드 프리뫼르·vin de primeur)이다. 프랑스 법에 따라 자정을 1분 넘긴 시각부터 전 세계에서 동시에 와인 판매를 시작한다.

이 독특한 마케팅 방식은 저렴한 와인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사례로 경영 서적에 누차 등장했다. 프랑스 유명 방송인이자 보졸레 출신인 베르나르 피보(Bernard Pivot)는 “보졸레 누보가 거둔 놀라운 성공을 이해하려면 와인 전문가보다 심리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피보 말대로 보졸레 누보는 프랑스 현지에서도 여전히 와인 전문가가 평가할 만큼 심오한 와인은 아니라는 취급을 받는다. 보졸레 누보는 통나무통에서 숙성을 하지 않기 때문에 소위 ‘고급스러운’ 와인에서 기대할 만한 향이 거의 나지 않는다.

와인의 뼈대를 만드는 타닌 성분이 거의 없어 입 안에서도 쉽게 넘어간다. 술을 빚는 도중 설탕(당분)을 넣어 달콤한 맛을 인위적으로 더할 수도 있다. 은근한 장미 사탕과 설 익은 바나나 껍질에서 나는 향이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게 대중적인 보졸레 누보의 맛이다.

이 때문에 보졸레 누보 애호가들은 ‘자극적이지 않고 여운이 있는 맛’이라 표현하지만, 반대편에서는 ‘이도저도 아닌 싱거움을 설탕으로 채운 맛’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보졸레 누보는 2000년대 초중반부터 5~6년전까지 11월 셋째 주만 되면 한동안 편의점과 대형마트 와인 판매대를 장식했다.

그래픽=이은현

그러나 소비자 눈높이가 이전보다 높아지고, 취향도 다양해지면서 보졸레 누보는 설 자리를 잃었다. 단순히 ‘프랑스 햇 와인’이라는 딱지 만으로는 선택 받기 어려운 시기가 닥친 셈이다.

이 자리는 보졸레 누보와 비슷하지만, 정체성이 분명한 다른 와인들이 채웠다. 미국을 대표하는 캘리포니아 피노누아가 대표적이다. 피노누아는 보졸레 누보를 만드는 가메(Gamay) 품종의 아빠 뻘이다.

가메는 프랑스에서 적포도 품종 피노누아와 청포도 품종 구애블랑을 교잡해 만들었다. 이 때문에 잘 만든 가메는 피노누아 성격을 띄기도 하고, 여리게 만든 피노누아는 가메와 비슷한 맛과 향을 지닌다.

다만 피노누아는 여러 포도 품종 가운데 유난히 재배하기 어려운 품종으로 악명이 높다. 껍질이 얇고 포도알이 빼곡히 열려 한번 곰팡이가 슬면 열매 채로 버려야 한다. 기후에도 민감해 조금만 추우면 포도가 설 익어 보졸레 누보처럼 싱거운 와인이 되버린다.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 해안과 중부 해안가는 피노누아를 대량으로 재배하기에 전 세계에서 손 꼽힐 만큼 좋은 곳이다.

미국하면 와인 애호가들은 나파(napa) 밸리부터 떠올리지만, 피노누아를 키우기에는 상대적으로 기후가 서늘한 태평양 인근 도시들이 더 적합하다. 산타 바바라, 몬테레이, 앤더슨 밸리처럼 산을 등지거나 끼고 있고 바다 앞에 자리 잡은 도시가 명산지다.

이 도시들은 바닷바람이 산을 타고 불어오는 골짜기에 있어서 낮은 햇볕이 뜨겁게 내리 쬐지만, 밤에는 차가운 캘리포니아 해류 영향으로 시원하다.

이 지역 피노누아는 잘 찾아 보면 놀랍게도 저렴한 와인들이 많다. 대규모 경작을 통한 상업화에 익숙한 미국 농업 특성 때문이다. 물론 흠 잡을 데 없을 만큼 좋은 와인은 수백만원을 호가한다. 그러나 피노누아의 기본적 덕목을 갖춘 보급형 와인은 프랑스 현지 보졸레 누보 가격보다 저렴하다.

카모미 와이너리가 선보인 롱반 피노누아(Long Barn Pinot Noir)가 대표적이다. 이 와인은 캘리포니아 해안도시 인근 포도 밭에서 키운 피노누아 품종 포도를 한 군데 모아 만든다.

여러 곳에서 나온 포도를 섞었기 때문에 유명 산지나 이름난 밭 한 곳에서 경작한 포도로만 만든 와인보다 개성은 덜 나타나지만, 대신 일반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특유의 체리와 딸기 향을 최대한 강조했다.

보졸레 누보가 가진 싱싱함과 달콤한 특성은 갖추면서도 텁텁한 뒷맛이나 강하게 치고 올라오는 알코올 냄새 같은 부정적인 요소는 카라멜과 바닐라 향으로 가렸다.

이 와인은 현재 편의점을 포함한 국내 소매 시장에서 1만5000원 수준에 팔린다. 이 정도면 지난해 보졸레 누보 판매가 2만5000원보다 40% 넘게 저렴하다.

미국 뉴저지 최대 와인 판매점 와인 바이어는 지난해 10달러 이하 미국 피노누아 가운데 롱반을 최고로 꼽으면서 “프랑스 와인의 좋은 점을 현대적인 스타일로 단순하게 풀어낸 와인”이라며 “최소 2배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롱반 피노누아는 2022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신대륙 레드와인 3만원 이하 부문 대상을 받았다. 국내에는 나라셀라가 수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