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수 네 명이 헤라클레스 같은 활약(Herculean contribution)을 해 준 덕분에 세계연합 팀은 미국에 맞서 버틸 수 있었다. 그동안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일본, 캐나다에 기댔던 세계연합 팀에 젊은 한국 선수들은 든든하게 의지할 만한 기반이 될 것이다."골프다이제스트, 2022년 9월 25일
지난달 23일, 미국과 나머지 국가들이 벌이는 골프 올스타전 '2022 프레지던츠 컵(Presidents Cup)'에 우리나라 선수 네 명이 세계연합 팀 소속으로 등장했다.
프레지던츠 컵은 미국 팀과 세계연합 팀에서 각각 선수 12명이 출전한다. 세계연합 팀 선수 가운데 3분의 1이 우리나라 선수였던 셈이다. 골프 강국 호주와 캐나다도 올해 대회에는 선수를 두 명씩밖에 내보내지 못했다.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총출동하는 대회인 만큼 프레지던츠 컵 출전은 프로 골퍼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목표다. 출전 선수는 세계 랭킹과 단장 추천으로 정해진다. 올해 출전한 네 선수 가운데 임성재와 김주형 선수는 자력으로 출전권을 얻었다. 이경훈과 김시우 선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트레버 이멜만 단장이 추천했다.
우리나라는 지난 2011년 최경주, 양용은, 김경태 선수 세 명이 한꺼번에 출전한 적은 있었지만, 네 명이 동시에 프레지던츠 컵 대회에 나선 적은 없었다.
이들 네 선수는 세계연합 팀이 대회 내내 따낸 12.5점 가운데 7.5점을 합작했다. 단순 계산으로만 따져도 점수 공헌도가 60%에 달한다.
골프 전문가들은 이들 '코리안 브라더스'가 바야흐로 한국 남자골프 르네상스를 새로 열었다고 평가했다. 2002년 최경주 선수가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한 이후,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한 한국 남자골프가 이제서야 제대로 빛을 내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코리안 브라더스의 선전(善戰)은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이들 가운데 이달 16일 기준 세계골프랭킹(OWGR)이 가장 높은 김주형 선수는 두 살 때 한국을 떠난 뒤 호주와 필리핀, 태국을 옮겨 다니며 골프를 익혔다. 2018년 미국과는 거리가 먼 아시아 지역 2부 투어 아시안 디벨롭먼트투어(ADT)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지만, 본인 스윙에 딱 들어맞는 클럽조차 제대로 구하지 못할 정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다.
임성재와 김시우 선수도 정글과도 같은 PGA 2부 투어를 헤치고 나온 후에야 본 무대 PGA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미국프로야구(MLB)에도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가 있듯, PGA도 우리가 잘 아는 1부 투어와 마이너리그에 해당하는 2부 투어로 나뉜다. 이 2부 투어는 그야말로 '눈물 젖은 빵'에 익숙해져야 하는 곳이다.
2부라 해도 우승 상금이 대회당 보통 10만달러(약 1억4000만원)를 웃돌지만, 미국 전역을 넘나드는 교통비와 숙식, 연습장 대여 비용, 캐디 임금 같은 경비를 합치면 매년 감당해야 하는 비용이 상당하다. 매 대회 순위권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면 남는 게 없다. 골프장 특성상 찾아가기도 힘든 미국 시골들을 구석구석 돌아야 할 뿐 아니라, 상금 사냥을 하고 이름을 알리려면 콜롬비아나 파나마 같은 인근 국가에서 열리는 대회도 챙겨야 한다.
김주형 선수는 수년간 고대하던 첫 우승을 한 이후 "간절한 시즌 첫 승을 이뤄내 기쁘다"며 "믿고 지지해주는 팬들과 CJ대한통운에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김주형 선수가 CJ대한통운(000120)에 고마움을 표한 이유는 가장 어려웠던 순간 그에게 손을 뻗은 곳이기 때문이다. CJ(001040)그룹은 2020년 CJ대한통운을 통해 김주형 선수가 가능성을 보이자마자 곧바로 후원 계약을 맺고 뒷바라지에 나섰다.
나머지 세 선수도 사정이 비슷하다. 네 명 모두 CJ대한통운이 후원사다. CJ그룹은 2012년 이경훈과 가장 먼저 메인 스폰서 계약을 체결했다. 김시우와는 2013년부터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임성재는 2018년 콘페리투어에 도전할 때부터 함께 했다. 마지막으로 2020년 김주형 선수와 손을 잡았다.
이들은 PGA 투어에 나설 때 모두 CJ그룹 로고가 박힌 똑같은 모자를 쓴다. 우리나라처럼 경제 규모와 골프 시장이 큰 국가에서 단일 브랜드가 남자 골프 주요 선수 후원을 독차지하는 사례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물다.
CJ그룹이 골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2001년 무렵이다. CJ그룹은 2000년대 접어들면 당시 일부 특권 계층 스포츠라는 사회적 인식이 붙어있던 골프에서 세계 무대에 진출할 젊은 선수를 발굴하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초기에는 여자 골프에 집중했다. 박세리 선수가 1998년 US오픈 정상에 오른 이후, 한국 여자 골프가 세계 무대에서도 통한다는 자신감이 막 생긴 시점이었다. CJ는 2001년 국내 오픈 대회 최연소 우승 기록이 있는 이선화를 시작으로 여자 골프 선수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시작했다. 이후 박세리, 박희정, 배경은 등 국내 정상급 여자 선수들로 후원 범위를 넓혔다.
2002년부터는 국내 최초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공식 대회 'CJ 나인브릿지 클래식'을 4년간 열었다. 이 대회는 세계 무대를 겪을 기회가 적었던 우리나라 여자 골프 선수들이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함께 경쟁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 대회에서 우승한 국내 선수는 LPGA 투어 직행 티켓을 따내며 곧장 '신데렐라'가 됐다.
CJ그룹이 2003년부터 후원한 박세리는 2007년 아시아인 최초이자 역대 최연소로 LPGA '명예의 전당 회원'이 돼 한국 여자 골프의 위상을 높였다.
이후 CJ그룹은 2010년대 들어 한국 여자 골프가 세계 최강 자리를 굳히자 여자 골프에서 손을 떼고 당시 세계 무대에서 업신여김당하기 일쑤였던 남자 골퍼 육성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2017년부터는 역시 국내 최초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정규 대회에 해당하는 '더 CJ컵'을 열었다. 더 CJ컵은 2019년까지 3년 동안 제주 나인브릿지 클럽에서 열렸지만, 2020년부터 올해 대회까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미국에서 열린다.
장소는 해외지만, 여전히 CJ컵에는 스폰서 추천으로 최대 18명 선수를 따로 초청할 수 있다. CJ는 이 자리에 매년 우리나라 선수 10여 명을 출전시켜 세계 대회에서 기량을 뽐낼 기회를 제공한다.
여자 골프가 세계 최강 자리에 세운 발전 모델을 그대로 남자 골프 육성에 적용한 결과, CJ대한통운이 후원을 시작한 2016년 이후 PGA투어 대회에서 우승한 우리나라 선수는 임성재, 김시우, 강성훈, 이경훈, 김주형 등 다섯 명에 달한다. 이들은 PGA에서 총 9승을 쌓았다. 이달 16일 기준 세계골프랭킹(OWGR) 100위권에 들어가는 우리나라 선수 4인방 김주형(15위), 임성재(20위), 이경훈(42위), 김시우(73위)은 모두 CJ대한통운 소속 선수다.
PGA 한국 선수 르네상스를 연 CJ그룹 스포츠 마케팅에는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추구하는 '온리 원(ONLY ONE)' 경영 철학이 깔려 있다.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야구, 농구 같은 인기 스포츠에 집중해서 투자하는 동안 CJ그룹은 골프라는 '차별화(differentiated)' 영역에서 선수는 물론 해당 종목 기반을 일궈내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CJ그룹 관계자는 "CJ는 이미 유명한 선수를 지원하기보다 유망주를 발굴해 세계 최정상급 선수로 육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한 기업이 골프 산업 전체를 흔들기는 어렵겠지만, 조금이라도 골프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려는 노력이 '최초(first)'와 '최고(best)'라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