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신격호 롯데 창업주 동생인 신준호 회장 일가가 운영해 온 유제품 전문기업 푸르밀이 갑작스레 사업 종료를 발표하자, '우리가 다음 차례가 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식품업계를 배회하고 있다.
식품업계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휩쓸고 간 지난 2년 동안 영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이름만 들으면 알법한 식품 대기업들이 줄줄이 적자로 전환했다.
올해 1분기만 놓고 봐도 하림(136480), 풀무원(017810), 롯데제과, 대한제당(001790) 같은 굵직한 곳들이 순익 기준 적자로 돌아서면서 흔들렸다.
남양유업(003920), 무학(033920), 마니커(027740)처럼 식품업계에서 오래도록 잔뼈가 굵은 기업들은 사정이 더 안 좋다. 이전부터 기록했던 적자를 좀처럼 돌려 세우지 못하고,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을 시작한 올해 들어서도 적자를 지속했다.
가뜩이나 좋지 않던 업계 분위기는 45년 업력 푸르밀이 무너지면서 더 흉흉해지고 있다.
식품업계 보수는 코로나 이전부터 유난히 적기로 유명했다. 그저 통설(通說)이 아니다. 주요 식품 대기업 사업 보고서를 기준으로 평균 연봉을 분석해보면, 지난해 식품업계는 주요업종을 통틀어 유일하게 평균 연봉이 5000만원대에 그쳤다. 1억2000만원이 넘는 정보통신(IT) 업계 절반에도 못 미친다.
식품 대기업들이 코로나19를 이유로 허리띠를 졸라 맨 사이 다른 업종들은 빠르게 연봉을 올리면서 이전보다 격차가 더 벌어졌다.
업계 직원들이 익명으로 의견을 나누는 온라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서는 '우리 회사도 2년 내내 경영상 어렵다는 말로 직원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우리도 지금 딱 푸르밀이랑 똑같은 처지인데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건 너무 속상하다' 같은 글이 무수히 올라왔다.
고(高)물가와 고환율로 경제난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최근 고금리까지 닥치면서 적자 위기에 몰린 일부 식품 기업은 이미 비상 경영에 돌입한 상태다.
가장 위험한 곳은 남양유업(003920)이다. 푸르밀 사태에서 보여지듯 유제품 기업들은 수년째 경영 환경이 나빠지고 있다. 유제품 업계 모든 기업들이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고 있지만, 남양유업만큼은 사업 확장도 용이하지 않다. 여전히 전방위적으로 불매운동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양유업은 올해 상반기 영업적자 422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기록했던 347억원 영업적자보다 적자폭이 더 커졌다. 2019년 3분기부터 12분기 연속 영업적자다. 금융정보분석업체 에프앤가이드 컨센서스에 따르면 13분기 연속 영업적자를 낼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대기업 계열사라고 예외는 없다. 풀무원의 유제품 전문 제조사 풀무원다논은 10년째 적자를 기록 중이다. 풀무원다논 연결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풀무원다논은 영업손실 70억3563만원을 기록했다. 2020년 32억9457만원과 비교하면 적자가 1년 만에 2배 넘게 늘었다. 풀무원다논은 2012년 출범 이후 지난해까지 단 한번도 흑자를 기록한 적이 없다.
풀무원다논의 모회사 풀무원은 이미 지난해 다른 자회사 풀무원푸드앤컬처에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당시 풀무원푸드앤컬처가 낸 적자 규모는 420억원이었다. 풀무원다논 구성원들은 이런 점을 들어 적자 규모가 커지면 언제든 자신들이 정리해고 대상으로 내몰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1985년 설립 이후 닭고기 외길을 걸어 온 유가증권시장 상장업체 마니커(027740) 역시 몇년 째 적자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니커는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연속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국내 치킨 시장은 배달음식 폭증과 맞물려 이전에 없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지만, 마니커에게는 악몽 같은 3년이었다.
이 기간 마니커가 기록한 영업손실은 2019년 150억원을 시작으로 2020년에는 309억원, 지난해 130억원까지 총 590억원을 기록했다. 마니커는 2012년 이후 지난해까지 10년 동안 2017,2018년 두 해를 제외하고 매년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유가증권시장에서 주가 역시 2018년 6월 주당 8171원까지 뛰었지만, 18일 현재 1200원까지 떨어졌다. 마니커는 2020년 이미 위탁 배송기사들과 부당해고 논란을 빚었다. 올해 1월에는 대표이사까지 교체했지만, 좀처럼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자칫 한계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해태제과 역시 경영상 빨간불이 켜진 상태다. 해태제과는 올해 상반기 기준 부채비율이 134.59%에서 163.43%로 30%포인트 가까이 올랐다. 금융업계에서는 보통 부채비율이 200%를 넘기면 재무구조에 문제가 심각하다고 평가한다.
올해 상반기 기준 식품 기업 가운데 부채비율이 200%를 넘어가는 곳은 하림(236.71%), 풀무원(232.02%), 신세계푸드(031440)(202%) 등이다.
신세계푸드는 지난 2015년 말 스무디 프랜차이즈 스무디킹 한국 내 판권을 180억원에 확보해 의욕적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스무디킹코리아의 매출은 약 82억원으로 전년(125억원) 대비 35%가량 줄었다. 2018년(169억원)에 비하면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반면 2018년 4억원대였던 손실 규모는 지난해 17억원대로 4배 넘게 늘었다. 당기순손실 역시 2018년 3억원대에서 지난해 29억원대로 9배 이상 손실 폭이 늘었다.
전명훈 나이스신용평가 기업평가3실장은 "올해 상반기 내내 유가와 해상운임이 높은 수준이었고, 대두나 팜유 같은 주요 식품 원재료 국제 거래가격도 뛰었지만 가격 전가력이 좋은 식품 기업들은 이런 조건과 상관없이 좋은 실적을 기록했다"고 말했다. 가격 전가력이란 원가 상승분을 제품 값에 반영해도 매출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전 실장은 "어떤 기업이 푸르밀처럼 될 것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초코파이'처럼 브랜드 가치가 독보적인 제품을 보유하지 못한 식품 기업들은 지금처럼 원가 상승에 고환율까지 겹치면 가격 전가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