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마트가 아닌 동네 슈퍼 선반 위에서 처음 만났던 와인.

일요일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가면 성찬 전례에서 신부님이 마시던 와인.

아버지가 소주병처럼 드륵드륵 스크류캡을 돌려 따서 맥주잔에 콸콸 따라 드시던 와인.

어떤 경험이든 처음은 짜릿하다. 우리나라 와인 소비자에게 생애 첫 와인을 물어보면 적지 않은 수가 '마주앙(Majuang)'이라고 답한다. 이처럼 마주앙은 수많은 소비자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불현듯 떠오르는 '추억 속 술'로 자리를 잡았다.

마주앙은 1977년 국산 1호 와인으로 출시됐다. 수입한 지 채 일 년도 안돼 사라지는 브랜드가 부지기수인 우리나라 와인시장에서 마주앙은 45년을 버텼다. 누적 판매량은 1억병을 진작 넘었다. 국민 와인 하면 떠오르는 '몬테스 알파' 누적 판매량보다 10배가 많다.

'마주 앉아 즐긴다'는 이름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마주앙을 사이에 두고 추억을 쌓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와인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마주앙은 수십년간 쌓은 대중성에 오히려 발목을 잡혔다. 와인이 드물었던 시기에 마주앙이 주었던 생경함과 강렬함은 어느덧 사라졌다. 반대로 '아빠나 마시던 옛날 와인',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 싸구려 와인' 같은 가혹한 조롱이 쏟아졌다.

지난 9일 롯데칠성음료는 한글날에 맞춰 '마주앙 스페셜 2종'을 새로 선보였다. 이 와인은 마주앙이 '촌스럽고 저렴한 와인'이라는 세간의 시선에 대한 대답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그동안 '마주앙을 새단장해야 한다'고 수년째 입이 닳도록 강조했다. 이번에 선보인 두 제품은 '와인의 본고장' 프랑스에서도 가장 비싼 와인들이 쏟아지는 부르고뉴(Bourgogne)와 샹파뉴(Champagne)에서 만들었다. 그동안 마주앙에 가졌던 소비자들의 선입견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새 와인 겉면에는 간송미술문화재단과 손잡고 국보 제294호 '백자초충문병' 사진을 입혔다. 이 조선백자는 앞뒤로 국화와 난초, 벌과 나비가 노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모두 와인이 가진 화려한 향을 표현하기 적합한 소재다. 롯데칠성음료는 이 제품 판매 수익금 가운데 일부를 간송미술문화재단 우리 문화재 보존 사업에 쓰겠다고 밝혔다.

그래픽=이은현

13일 서울 성동구 딜리셔스보틀샵앤바에서 이소리 딜리셔스보틀샵앤바 오너 소믈리에 도움을 받아 새 마주앙 두 종류를 모두 맛봤다. 이소리 소믈리에는 2012년 제 1회 라피트 로칠드 스페셜 프라이즈 1위를 차지한 우리나라 최정상급 소믈리에다.

식사 전에 입맛을 돋우기 위해 자주 마시는 샴페인으로 시음을 시작했다. 이소리 소믈리에는 평소 샴페인을 마실 때 사용하는 길쭉한 잔 대신 지름이 더 넓은 백(白) 포도주용 잔에 샴페인을 따랐다.

샴페인에서 나는 향을 더 풍성하게 느끼기 위해서다. 잔을 타고 옅은 볏짚색 와인이 기포를 뿜으면서 스르르 흘러 내렸다. 곧 이어 차르르 거품 터지는 소리가 이어지며 청각을 자극했다.

샴페인은 오직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만든 스파클링 와인에만 붙일 수 있다. 일반 와인처럼 기본이 되는 와인을 먼저 만들고, 여기에 효모와 당분을 적절히 넣어 최소 1년에서 길게는 3년 넘게 병 속에서 한번 더 숙성한다. 이 숙성 과정에서 샴페인만의 독특한 빵 굽는 향과 아몬드 같은 견과류 향기가 생긴다.

이 샴페인에서도 잔에 따르자 마자 달걀과 버터로 반죽한 빵을 구울 때 나는 고소한 내음이 은은한 꽃 향기와 함께 뿜어져 나왔다. 겉에 그려진 백자초충문병 속 국화를 제법 닮은 듯한 느낌을 줬다.

이소리 소믈리에는 "국화와 난초에서 날 법한 은은한 꽃 향기가 매력적"이라며 "기포가 입안에서 터지는 느낌이 다소 거칠긴 하지만, 젊고 힘찬 스파클링 와인을 좋아하는 소비자에게 충분히 권장할 만한 샴페인"이라고 평가했다.

샴페인은 양조 과정에서 여느 와인보다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만드는 사람의 실력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샴페인은 우리나라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생산자가 만들진 않았다.

그러나 와인을 만들 때 쓰인 포도는 샹파뉴에서도 가장 알짜배기 지역으로 꼽히는 '르 메닐 쉬르 오제(Le Mesnil-sur-Oger)'에서 가지고 왔다.

이 지역은 특히 샤르도네(Chardonnay)라는 백포도 품종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전 세계에서 샴페인용으로 쓰기 가장 좋은 포도가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샴페인도 온전히 샤르도네 포도 한 종류만 이용해 만들었다. 보통 와인 생산자들은 특정 품종이 가진 결점을 감추기 위해 여러 종류 포도를 섞어 와인을 만든다. 가령 신선한 과일향을 뿜어 내지만, 무게감은 부족할 경우 중후한 느낌을 주는 포도를 더해 맛을 보강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 샴페인처럼 한 종류 포도만 이용해 와인을 만들면 그 포도가 가진 잠재력만 가지고 승부를 봐야 한다. 다른 색을 섞지 못하는 백자와 꼭 닮았다.

이소리 소믈리에는 "가장 비싼 샴페인을 만드는 포도와 같은 지역 포도를 썼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격도 경쟁력이 있는 편"이라며 "지금 제철을 맞은 굴에 치즈와 버터를 살짝 올려 구운 다음 이 샴페인과 함께 마시면 궁합이 잘 맞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 샴페인은 750밀리리터(ml) 1병에 7만원이다. 1200병만 롯데백화점과 롯데칠성음료 주류 전문점 '오미오비노' 등지에서 한정 판매한다.

그래픽=이은현

이어 어른 주먹만큼 넓게 퍼진 잔에 마주앙 뉘생조르쥬를 따랐다. 이 와인은 여러 포도 품종 가운데 가장 다루기 어렵다는 피노누아(pinot noir)로 만든 와인이다.

피노누아 품종으로 만든 이 지역 와인은 하늘하늘 거리는 장미 꽃잎을 떠올릴 만큼 우아한 맛, 연하고 투명해서 손가락을 넣으면 잠길 것 같은 루비 빛깔을 미덕으로 삼는다.

이소리 소믈리에는 "이 와인에 들어간 포도가 자랐던 2019년 여름은 뉘생조르쥬 지역이 여느 해보다 건조하고, 온도가 높았다"고 귀띔했다.

고온 건조한 환경이 이어지면 더 달콤한 포도 열매가 맺힌다. 얼핏 좋아 보이지만 와인을 만들기에 마냥 이상적인 조건은 아니다.

당도가 많이 농축되면 오히려 여리고 섬세한 와인을 만들기가 어렵다. 페인트를 칠하는 붓으로 소묘를 그리기 힘든 것과 비슷하다. 어리숙한 생산자라면 자칫 투박해서 마시기 버거운 와인을 만들 가능성이 크다. 이 와인 역시 장미보다 훨씬 맛과 향이 진한 검붉은 자두 향이 두드러졌다.

이소리 소믈리에는 "조선백자라기 보다는 화려한 무늬를 깊게 새긴 진한 청록색 고려청자가 떠오른다"며 "감칠 맛과 짠 맛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산미(acidity)가 부족해 섬세함이나 우아함을 느끼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렇게 진한 피노누아 와인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마시다 보면 점차 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니 끝까지, 마지막 한 잔을 비울 때 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덧붙였다.

마주앙 뉘생조르쥬는 750밀리리터(ml) 1병에 10만원으로 같이 선보인 샴페인보다 비싸다. 시중에 팔리는 마주앙 와인은 1만800원에서 1만5000원 수준이다. 적게 잡아 6배에서 거의 10배 가까이 비싸다. 이 와인 역시 1200병만 정해진 곳에서 한정 판매한다.

마주앙 치고 가격대가 높지만, 초기 소비자 반응은 나쁘지 않다. 롯데백화점 본점에는 9일 두 와인이 각각 12병 들어왔다가 사전 예약 분을 합쳐 하루 만에 절반 넘게 팔렸다.

12일 다시 본점 매장을 찾았을 때는 판매대에 3병씩 밖에 남지 않았다. '마주앙도 고급화가 가능하다'는 명제를 반 쯤은 증명해 낸 셈이다.

이소리 소믈리에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이나 우리 문화재 같은 키워드는 이 정도 가격대 와인을 즐기는 소비자라면 충분히 관심을 가질 만한 소재"라고 했다.

그는 "홈플러스가 영국 유명 주류 회사 베리 브라더스 앤 러드(BBR)와 손잡고 성공적인 와인 PB(Private Brand)상품을 만들어 낸 것처럼 마주앙도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은 와인에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스토리를 입히면 '싸고 진부하다'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