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겉면(레이블·label)은 곧 그 와인의 얼굴이다. 겉면만 보고 와인을 고르는 소비자도 부지기수다. 이 때문에 유명한 와이너리들도 남다르게 와인 겉면을 꾸미려 노력한다. 화려한 겉면으로 어떻게든 소비자 시선을 붙잡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와이너리 샤토 무통 로칠드(Chateau Mouton Rothschild)는 피카소·샤갈·달리·이우환 화백 같은 세계적 거장이 그린 그림을 매년 겉면에 바꿔 넣어 ‘명화(名畫) 모음집’이라고도 불린다. 이들 와이너리는 대체로 겉면에 해당 작품과 함께 본인 와이너리에 대한 정보도 꼼꼼히 적는다. 겉면 전체를 글자 하나 없이 생소한 작품만으로 가득 채우는 와이너리는 보기 어렵다.
미국 캘리포니아 와이너리 ‘오린 스위프트(Orin Swift)’ 설립자 데이비드 피니(David Phinney)는 이런 면에 있어 여러 도전적인 시도를 아끼지 않는다. 이름난 아티스트 작품에 기대기보다 본인이 만든 와인을 시각적으로 나타내주는 작품과 오브제(상징물)를 직접 만들어 와인 겉면을 장식한다.
여행 때마다 공항에서 구입했던 잡지 수백 권을 모아 잡지 속 사진으로 콜라주로 만든다던가, 사막과 폐차장에서 직접 사진을 찍어 겉면에 붙이는 식이다.
이 와이너리에서 가장 좋은 포도를 골라 만든 와인은 병에 그 어떤 글자도 새기지 않고 1945년 발행을 중단한 미국 동전 하나만 박아 넣었다. 어린 시절 동전 수집을 했던 피니 설립자가 본인이 좋아했던 희귀 주화를 직접 구해 일일이 붙여 만든다. 이 동전은 겉 화폐 단위가 10센트(약 140원)에 불과하지만, 이미 단종된 수집품이라 동전 하나당 2달러(약 2900원)를 주고 사와야 한다. 본인이 동전 수집을 할 때 느꼈던 희열을 소비자에게 주기 위해 비용을 추가로 짊어지는 셈이다.
세계에 400명 남짓한 와인 박사 ‘마스터 오브 와인(Master of wine)’ 칭호를 가진 니콜라스 패리스는 피니 설립자를 “와인에 새긴 철학을 겉면에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천재적인 인물”이라 표현했다.
피니 설립자는 와인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다가 이 업계에 불현듯 빠져들었다. 그는 미국 애리조나대학교에서 정치학과 역사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 본래 대학 졸업 후 로스쿨에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한 학기 동안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유학을 하다 와인에 매료됐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로펌 대신 와이너리에 이력서를 넣으며 진로를 바꿨다. 그런 그에게 미국에서도 명성이 높은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가 손을 내밀었다.
피니는 이곳에서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 경험을 차곡차곡 쌓고, 1998년 오린 스위프트 와이너리를 열었다. 오린 스위프트는 아버지 중간 이름 오린(Orin)과 어머니 결혼 전 성(姓) 스위프트(Swift)를 합쳐 만든 이름이다.
20년 남짓한 짧은 역사에도 오린 스위프트는 독특한 겉면과 그에 부합하는 품질로 평론가들과 소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오린 스위프트가 자랑하는 간판 와인 ‘팔레르모’ 겉면에서도 다른 와인에서는 보기 힘든 강렬한 사진을 볼 수 있다. 팔레르모는 이탈리아 남부의 섬 시칠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 이름이다. 피니 설립자는 어느 날 내셔널 지오그래픽지(紙)를 보다 팔레르모 지하 묘지에서 미라가 돼버린 성직자 사진을 만났다. 좀처럼 와인을 떠올리기 어려운 바싹 마른 성직자 사진을 보면서 그는 그 숭고함이 본인이 만드는 와인에 꼭 맞는다고 생각했다.
팔레르모에 쓰이는 카베르네 소비뇽은 세계 어디서나 잘 자라 와인 생산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포도 품종이다. 그러나 심은 땅 상태에 따라 맺는 포도 열매의 맛은 천차만별이다. 오린 스위프트가 자리 잡은 캘리포니아 아틀라스 피크·세인트 헬레나·러더포드 지역은 여름 내내 충분한 햇빛이 쏟아지기 때문에 유난히 과일 향이 풍부하고, 입안에서 느껴지는 질감이 두텁다.
피니 말대로 한때 절대적인 힘과 품격을 갖췄던 성직자의 미라는 농익은 과일 향 속에서도 중후함을 잃지 않는 이 와인과 잘 어울린다. 특히 와인에서 확연히 느껴지는 검붉은 체리 향은 사진 속 성직자 미라가 두른 빨간 망토, 미라 머리 위 검은 모자와 정확히 겹친다.
오린 스위프트 주요 와인들은 대형마트를 포함한 시중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다. 국내에는 롯데칠성음료가 수입한다. 그 가운데 팔레르모는 올해 ‘2022 대한민국주류대상’에서 레드와인 신대륙 부문 대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