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 출신의 아버지는 미식가였다. 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어깨 너머로 어머니가 요리하는 걸 지켜봤다. 바빠서 술은 못 만드는 어머니 대신, 술 전문가 ‘이모’가 때 되면 집에 출장오셨다. 그 이모가 막걸리에 소주를 타는 신기한 광경도 지켜봤다.
더운 여름에 쉽게 상하는 막걸리는, 도수 높은 소주를 섞으면 술이 쉬 상하지 않는다는 건, 어른이 되고 나서도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그게 여름에 상하지 않는 술, 과하주였다. 발효주인 와인이 상하지 말라고, 증류주를 일부 섞은 스페인의 셰리 주, 포르투갈의 포트와인보다 100년 앞선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운 여름나기’ 술 제조법이 과하주다.
그게 인연이 됐을까? 우리술에 어울리는 음식을 선보이는 주안상대회(2015년)에 나가 금상(과하주 부문)을 수상했다. 그가 출품한 음식은 우족편. 다소 단맛이 강한 과하주에 잘 어울릴 안주로, 맛이 담백한 우족편을 내놓은 것이다. 우족 부위 살코기를 발라 굳힌 그냥 우족편이 아니라, 그 위에 다섯가지 색깔을 입힌 ‘오채 우족편’이었다. 계란(흰색, 노랑), 미나리(녹색), 실고추(빨강), 석이버섯(검정)으로 색깔을 냈다.
서울 도봉산 산꾼들 사이에서 유명한 한식주점 ‘도봉산팔뚝집’ 김미숙 대표가 식당을 차린 이야기다. 편집디자인 일을 오래했던 김 대표는 요리를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는데도, 덜컥 요리경연대회(주안상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한 게 계기가 돼서, 그 이듬해인 2016년에 도봉산 입구에 도봉산팔뚝집을 차렸다. 이 주점은 곰삭은 김장김치를 산적처럼 꿰서 밀가루, 계란을 묻혀 익혀낸 ‘김치적’,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는 평양식 만두로 만든 만두전골 등이 인기 메뉴다. 김 대표가 중국까지 건너가 배워온 요리 ‘따판지’는 실크로드식 마라 닭볶음탕이다.
그런데 이름이 왜 팔뚝집일까? 팔뚝집의 유래는 조선시대에서 비롯됐다. 몰락한 양반가의 여인네들이 생계를 위해 궁여지책으로 문간방 한 칸을 내서 가양주를 팔았던 공간을 말한다. 당시 반가의 여인들은 외간 남자에게 얼굴을 보여서는 안되는 관습법을 따라야했다. 그래서 손님이 오면, 안주인은 얼굴을 보이지 않고 팔뚝만 내밀어 술과 안주를 냈다. 여기에 ‘팔뚝집’ 이름이 유래된 것이다. 도봉산 팔뚝집은 이 옛 스토리를 반영해 이름을 지었고, 등산객들을 위한 안주와 술을 내놓고 있다. 도봉산 팔뚝집은 현재 리뉴얼 공사 중이라 잠시 휴점 상태다. 10월 중으로 문을 다시 열 예정이다.
도봉산 팔뚝집은 팔도의 막걸리를 맛볼 수 있는 전통주점이다. 주점 내벽 한켠에 전국지도를 내걸고, 지역막걸리들을 만든 양조장이 있는 곳들을 표시해놓았다. 전국 팔도의 막걸리를 착한 가격에 판매해온 김미숙 대표가 최근, 직접 막걸리를 만들었다. 이름하여 도봉산막걸리. 더 놀라운 것은 전통 문헌에 나오지도 않는 누룩을 직접 개발해서, 술을 빚었다는 사실.
김 대표가 직접 만든 누룩은 도화곡이다. 도화? 복숭아꽃을 말한다. 누룩 색깔도 진한 핑크빛이고 이걸로 만든 막걸리도 연한 핑크빛을 띤다.
“도화곡은 고문헌에 나오지도 않는 누룩으로 내가 처음 만든 것이다. 물론 누룩공부를 꾸준히 해온 덕분에 개발한 것이다. 법고창신(옛 것을 새로운 것으로 거듭나게 함)의 정신으로 만들었다고 자부한다. 도화곡은 현대에 새롭게 만든 누룩이지만, 조상들이 만든 쌀누룩 이화곡을 토대로 해서 만든 것이다.
쌀로 만든 누룩으로 옛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누룩이 이화곡인데, 이 이화곡에 핑크빛 홍국균을 입혀 만든 게 도화곡이다. 원래 중국에 홍국 누룩이 있었다. 내가 음식을 하다보니, 중국음식에도 관심이 많아 중국 음식과 재료 공부를 하다가, 홍국 누룩을 알게 됐다. 홍국(홍국 누룩을 말함)은 홍국균인 붉은누룩곰팡이를 멥쌀밥의 밥알 표면에 배양한 누룩을 말하는 것으로, 이 홍국을 빻아서 쌀가루를 섞어 만든 것이 도화곡이다. 쌀가루 함유량이 대부분이고, 홍국은 5% 이내다.”
도화곡으로 빚은 도봉산막걸리는 색상부터 여느 막걸리와는 판이하다. 홍국누룩 영향으로 술 빛깔이 핑크빛을 띤다. 단맛과 신맛이 적당히 어우러져서, 마시기에 편하고 은은한 꽃향이 특징이다. 꽃향 또한 누룩(도화곡) 영향이다. 프리미엄 막걸리는 쌀, 누룩, 물 이 세가지로 술을 빚는데 여기서 베리에이션(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은 누룩이 유일하다. 어떤 누룩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술 맛과 향, 색상까지 무궁무진한 변화를 줄 수 있다. ‘술은 누룩이 만든다’는 얘기의 좋은 본보기가 도봉산막걸리다.
-주점을 하다가 양조장을 차린 계기는?
“코로나 영향으로 팔뚝집 운영이 어려워졌다. 한동안은 오후 8시면 문을 닫아야했고, 3명 이상은 한자리에 앉지도 못했다. 그런데 우리 식당은 오후 6시에 문을 열었다. 2시간 영업만 해야했으니, 피해가 엄청났다. 그렇다고 배달음식으로는 안맞았다. 팔뚝집 음식은 식당 음식이기 보다는 명절날 친척집에서 대접받는 음식같은 느낌이라는 반응이 많았는데, 식어빠진 음식을 손님께 보낸다는 게 용납이 안돼 배달은 몇달 하다가 말았다.
그래서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그때 양조장을 차릴 작정을 했다. 당초 도봉산팔뚝집을 열 때부터 양조장을 함께 할 생각은 있었지만, 그 지역이 식품위생법상 양조장 허가가 나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양조장을 이곳 경기도 양주에 차렸다. 양조장 차리기 전, 팔뚝집 운영을 할 때부터 판매는 하지 않았을 뿐이지, 술은 꾸준히 빚어왔다.”
-술은 어디서 배웠나?
“전통주 교육기관인 한국가양주연구소에 들어가 기초반부터, 양조장 예비 창업자들이 많이 듣는 최고지도자반까지 다녔다. 가양주연구소에서만 술을 배운 게 아니었다. 막걸리학교의 청주양조 과정도 다녔고, 서울시 무형문화재인 권희자 선생님의 삼해약주도 배웠다. 특히, 삼해 막걸리는 2016년부터 매년 빚어왔다. 술뿐 아니라 전통음식도 체계적으로 배웠다. 한복려 원장님의 궁중음식연구원 과정도 모두 수료했다. 선인양조장은 2021년 12월에 정식으로 설립했다.”
-도봉산막걸리는 어떤 막걸리인가?
“도봉산막걸리는 프리미엄 순수 막걸리다. 쌀, 물, 누룩으로만 술을 빚었다. 도봉산막걸리는 알코올 도수 8도, 12도 두 가지가 있다. 밑술과 1차담금은 멥쌀, 2차 담금은 찹쌀을 쓴다. 일체의 인공감미료, 색소, 향은 사용하지 않고, 입국, 효모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도봉산막걸리가 다른 막걸리와 확실히 다른 점은 홍국 누룩인 도화곡으로 빚었다는 점이다. 도화곡으로 빚은 술은 도봉산막걸리가 유일하다. 도화곡은 양주쌀로 만든다. 도화곡은 쌀을 불려서, 가루를 낸 뒤에 붉은 누룩곰팡이균을 넣고 띄워 만든다. 그래서 색이 분홍색이다. 띄울 때는 그 시기에 맞는 꽃이나 식물을 같이 넣어 야생효모를 붙게 한다. 가령, 봄이면 진달래꽃을 누룩에 얹거나 연잎, 도꼬마리, 뽕잎, 쑥대 등을 이용한다. 그래서 막걸리에 꽃향이 난다. 보통 홍국막걸리 하면 홍국쌀로 만든 술이 많은데, 선인양조는 홍국누룩인 도화곡으로 술을 빚는다.”
-도화곡 누룩은 어떤 모양인가?
“여러가지 모양으로 만든다. 일반 밀누룩처럼 사각형 틀에 넣어 성형하는 ‘덩이형’이 있고, 계란 모양의 ‘난형(주먹 크기의 알모양)’, 백설기처럼 ‘가루형’도 있다. 모양에 따라 쓰임새가 다르다. 덩이형 도화곡으로 술을 빚으면 알코올 도수가 상당히 높게 나온다. 도수 높다고 꼭 좋은 술이라고 할 수 없다. 달달한 술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맞지 않다. 도수 낮춘다고 물을 타면 쓴맛이 도드라져 단맛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도봉산막걸리에는 도화곡 한가지 누룩만 쓰나?
“도봉산막걸리에는 도화곡과 밀누룩, 두가지를 쓴다. 밑술에는 밀누룩, 최종(2차) 덧술에는 도화곡이 들어간다. 중간(1차) 덧술에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는다. 도봉산막걸리는 밑술과 두번의 덧술을 하는 삼양주다. 2차 덧술에 색깔과 향을 입히기 위해 도화곡을 쓴다. 두가지 누룩을 쓰기 때문에 밀누룩을 많이 쓰지 않아 누룩냄새도 별로 나지 않는다. 쌀누룩인 도화곡에는 누룩취가 거의 나지 않는다. 대신에 꽃향이 난다.”
-삼해 막걸리도 매년 소량 생산한다고 들었다.
“2016년부터 7년째 삼해주를 해마다 빚고 있다. 삼해주는 고려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술로,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정월 첫번째 돼지날(해일)에 밑술을 하고, 36일을 기다려 다시 돌아오는 돼지날에 첫번째 덧술을, 그리고 또 돌아오는 돼지날에 두번째 덧술을 해서 만드는 술이다. 세번의 돼지날에 걸쳐 나눠 만드는 술이라고 해서, 삼해주라 한다. 100일의 발효 기간을 거쳐 완성된다. 첫 돼지일로부터 100일 되는 날 술을 거르고, 영하 4도 이하에서 숙성 보관 후 병입한다.
삼해주는 약주, 증류주로도 만들 수 있지만, 내가 만드는 삼해주는 삼해 막걸리다. 레시피(제조법)상, 쌀 함유량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요리책인 조선디미방에 나온 레시피보다 쌀 함유량을 약간 더 늘려 단맛이 조금 더 나게 만들었다. 도봉산막걸리 자체도 쌀 함유량이 많은 편인데, 삼해주는 쌀이 더 많이 들어간다. 앞으로 삼해약주도 만들 생각이다.
삼해주는 여간 까다로운 술이 아니다. 절기를 맞추어 빚는 술이라, 때를 놓치면 만들 수 없는데다, 때를 맞춰 만든다 하더라도, 중간에 한번이라도 잘못 빚으면 그해 삼해주는 만들 수 없다. 한번의 밑술, 두번의 덧술 중 한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게 삼해주다. 소량 생산이라, 금방 완판된다.”
-음식과 관련해, 어울리는 술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나?
“특정 음식에 어울리는 술이 따로 정해져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술을 마시는 개개인의 취향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팔뚝집 같은 경우에는 손님으로부터 술 추천 요청이 들어오면 드라이한 술, 산미가 있는 술, 달콤한 술 이렇게 나눠 원하는 스타일을 물어보고 술을 권한다.
중국 신장 위구르 스타일의 마라 닭볶음탕인 ‘따판지’처럼 맵고 자극적인 음식에는 약간 달콤하거나 부드러운 술, 약간의 산미가 있는 술을 권한다. 옛날에는 술을 밥과 같이 먹는 반주로 드셨지만, 요즘에는 음식과 함께 대등하게 술을 즐기는 분들이 많다. 밥과 같이 먹는 반주로는 단 술은 안맞다. 약주가 어울린다.
요즘에는 요리에 맞춰 술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매운 음식에는 부드러운 술을 권한다. 다소 밍밍하다, 단조로운 안주에는 술아원 양조장의 달달한 과하주처럼 화려한 술이 어울린다. 새콤한 음식을 시킨 손님에게는 송명섭 막걸리같은 드라이한 술을 권한다. 전통술을 잘 아는 손님들도 많아 ‘이 술 있어요?’ 미리 전화로 확인하고서 오는 경우도 많다. 손님들도 음식과 술을 고를 때, 고정관념이 없는 분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