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출고로 바빠야 하는데, 저렇게 막아 버리니 어쩔 수 없죠.”
지난 22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화물연대본부가 ‘화물연대 총력 결의대회’를 연 하이트진로(000080) 이천공장의 출고장에서 만난 회사 관계자가 한 말이다. 평소였다면 지게차와 화물차로 분주해야 할 출고장이었지만, 화물연대의 대규모 집회 예고에 회사가 출고 중단을 결정하면서 공장 밖을 나서지 못한 소주들만 한 켠에 쌓여있었다.
해당 관계자는 “여름이 소주 비수기라고는 해도 휴가철을 맞이한 만큼 분주하게 출고를 진행해야 하지만, 대규모 집회를 연다고 하니 출고에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여 중단 결정을 하게 됐다”고 했다.
이날 하이트진로 이천공장 앞에는 지난 3월부터 시작된 화물차주들의 운송료 인상 요구를 지원하기 위한 민주노총 소속 인원 700여명이 모였다. 애초 화물연대는 이날 집회 참석 인원을 1200명으로 신고했지만, 청주공장으로 일부 인원을 분산시키면서 500명 가량 적었다.
집회 참가 인원이 예정보다 적었지만 12m 폭 공장 앞 도로를 메우기엔 충분했다. 경찰은 집회가 예정된 오후 3시보다 2시간가량 앞선 오후 1시쯤부터 공장 출입구 교통을 통제했고, 오후 2시쯤이 되자 화물연대가 결의대회 단상으로 사용하기 위한 17톤(t) 화물차가 도로 한복판을 가로막았다.
도로를 가로막은 화물차 옆으로는 지난 6월부터 공장 앞 도로 약 740m 가량을 불법 점유하고 있는 화물차 수십대가 줄지어 서있었다. 차량마다 이천시가 차고지 외 밤샘주차 위반으로 발급한 적발통지서가 대여섯개씩 붙어 있었다.
결의대회는 소나기로 인해 당초 계획보다 25분 늦게 시작됐다. 공장 앞 왕복 2차선 도로 135m 가량을 가로막은 조합원들은 “130명 집단해고 하이트진로 규탄한다”, “손배(손해배상청구 소송)가 웬 말이냐 하이트진로 각성하라”, “총파업 투쟁 승리하여 하이트진로 바꾸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집회를 주도한 김경선 화물연대 대전지역본부장은 “하이트진로는 코로나19 사태에도 지난해 1700억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봤고 올해에는 상반기만 해도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두 배에 가까운 이익을 볼 것”이라면서 “그런데 화물 노동자들의 삶은 고유가, 저운임으로 일을 해도 적자 인생에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하이트진로가 제대로 교섭에 응하지 않는다면서 “운송료를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직을 뿌리내리는 것도 투쟁 목표로 삼겠다”고도 했다.
화물연대에 따르면 하이트진로는 화물 운송 위탁사인 수양물류 소속 화물차주 130여명의 계약을 종료하기로 했다. 임금 30% 인상, 공병운임 인상, 공회전비용 지급, 차량 광고비 월 50만원과 세차비 지급, 대기 비용 지급, 휴일 근무 운송료 150% 지급을 요구하며 지난 3월부터 파업에 나선 게 이유가 됐다.
하이트진로는 지난달 불법집회 참가자 중 적극 가담자를 상대로 7억2000만원 가량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지난달 2일 수양물류 소속 화물차주 130여명의 총파업으로 출고에 차질을 빚어 생산 중단까지 이르렀고, 출고율을 높이기 위해 일일 계약 화물차를 이용하면서 파업으로 인한 손해가 크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주에는 휴가철을 맞아 출고율을 높이기 위해 야간 시간대까지 활용해 제품을 출고해 왔다. 파업 상황으로 낮 시간대 출고량을 늘리는 게 여의치 않아 불가피하게 추가 비용을 내고서라도 야간 시간 출고를 하게 됐다는 것이 회사 측의 설명이다.
이날 정상적으로 제품을 출고할 예정이었던 청주공장도 오후부터 제품 출고를 중단했다. 화물연대가 예고하지 않았던 대규모 집회를 청주공장에서도 열면서다. 경찰에 따르면 이천공장 집회가 진행되던 시각 청주공장에도 화물연대 소속 인원 300명이 모여들었고, 도로를 점거하며 농성에 돌입했다. 이들 중 일부는 철야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수양물류 소속 화물차주들의 계약 만료일이 오는 26일로 사흘밖에 남지 않은 만큼 하이트진로가 출고율을 높이기 위해 활용하고 있는 야간 출고마저 막아서 요구 사항을 관철하겠다는 것이다.
이천공장과 청주공장은 하이트진로 소주 생산의 약 70%를 차지한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앞서 평소 보다 높은 수준의 출고율을 유지해왔기에 공장 내부 적재 공간에 여유가 있어 일각에서 제기되는 생산 중단 사태까지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집회가 종료되는 23일 오후까지는 상황을 주시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6월부터 이어진 파업으로 인한 문제는 제품 출고만이 아니다. 파업 집회 참가자들이 공장 정문 앞에서 녹음된 구호를 확성기로 틀어대면서 발생하는 소음과 장기간 불법 주차된 화물차들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특히 집회 현장에서 100m 가량 떨어져 있는 이천공장의 업무지원동과 공장 경비소는 소음 피해가 크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업무지원동에 대략 50명 정도가 근무하고 있는데 집회 현장에서 들리는 욕설 등이 사무실 안까지 들린다”고 했다.
공장 경비를 하고 있는 신모(69)씨는 “하루 종일 확성기를 통해 재생되는 똑같은 소리를 들어야만 하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라면서 “공장 앞 도로도 화물차로 막혀있어 공장 안에 주차하기가 어려워져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해두고 걸어서 들어온다”고 했다.
화물차주들의 공장 앞 도로 불법점거에 따른 피해는 주차 불편만이 아니다. 지난 9일 새벽에는 이천공장 앞 42번 국도를 지나던 승용차가 불법주차된 14t 화물차를 들이받아 운전자인 30대 남성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해당 사고는 42번 국도에서 공장 쪽의 도로로 빠져나가는 구간에서 발생하면서, 지자체가 불법주차를 방치해 발생한 사고라는 지적도 나왔다.
집회 현장을 관리하는 경찰의 고충도 크다. 이날 집회 현장에서 만난 경기남부경찰청 관계자는 “집회가 장기화되며 매일 같이 200명씩 이곳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면서 “그 인원을 민생 치안에 돌려 활용하면 훨씬 공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경찰은 이날도 집회 현장을 중심으로 5개 중대 규모의 경력을 배치했다.
또 예고에 없던 청주공장 집회에도 경찰을 급히 파견했다. 청주 흥덕경찰서는 전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화물연대 조합원 29명을 현행범으로 체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