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대거 임원으로 승진한 국내 주요 식품기업의 오너 3세가 경영능력 입증을 위한 신사업 행보를 본격화하고 나섰다.

경영 성과를 쌓아 초고속 승진이란 내부 불만을 줄이고 차세대 리더로서 능력을 증명, 승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

/그래픽=손민균

24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이재현 CJ(001040)그룹 회장의 장남인 이선호(31) 경영리더가 가장 적극적인 존재감 드러내기에 나섰다.

올해 초 CJ제일제당(097950)의 미국 사업을 총괄하는 식품전략기획 1담당을 맡은 이 경영리더는 최근 ‘햇반 글로벌 프로젝트’를 꺼내 들었다.

햇반 글로벌 프로젝트는 이 경영리더가 미주 사업을 총괄하는 1담당으로 승진한 후 처음으로 꺼낸 핵심 프로젝트다. 그는 2025년까지 1조원 이상으로 커질 것으로 전망되는 미국 즉석밥 시장에서 햇반(수출명 멀티그레인)을 제2의 비비고 만두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정했다.

1990년생인 이 경영리더는 미국 컬럼비아대 금융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2013년 CJ제일제당에 입사했다. 입사 후에는 식품전략기획팀과 바이오사업팀에서 근무했다. 앞서 LA레이커스와 ‘비비고 글로벌 마케팅 파트너십’ 체결을 이 경영리더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CJ제일제당 내부 관계자는 “햇반의 수출용 전략 제품인 멀티그레인은 오는 8월 월마트를 포함한 미국 유통체인 4000여곳에 입점이 확정됐다”면서 “햇반이 이 경영리더의 아버지 이재현 회장의 경영철학이 담긴 제품인 만큼 전사적인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신동원 농심(004370) 회장의 장남인 신상열(28) 상무(구매 담당 임원)도 성과 내기에 돌입했다. 2018년 미국 컬럼비아대를 졸업한 직후인 2019년 3월 농심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약 3년 만에 임원 자리까지 초고속 승진하며 경영 능력 검증 부담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농심이 배달 애플리케이션(앱) 배달의민족 운영사 우아한형제들과 손잡고 진행한 ‘너구리 골든티켓 이벤트’가 신 상무의 작품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김봉진 배달의민족 의장과 함께 너구리 제품 디자인 협업 및 너구리에 들어간 골든티켓 찾기 이벤트를 진행했다. 신 상무와 김봉진 의장의 만남으로 시작된 이 행사는 소비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다시마 2장이 들어있는 너구리가 행운의 상징으로 여겨진다는 점에 착안해 진행한 이벤트로 ‘너구리 멀티팩(5봉)’에 무작위로 배민 할인쿠폰(골든티켓)을 넣었다.

골든티켓은 1만원 할인쿠폰 365장으로 구성됐다. ‘4+1 행사’ 정도에 그쳤던 농심의 마케팅이 180도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승준 오리온 대표이사, 백상엽 카카오엔터프라이즈 대표이사가 지난 4월 19일 경기 분당구에 위치한 카카오엔터프라이즈 본사에서 업무 협약을 맺었다. /오리온 제공

담철곤 오리온(271560) 회장의 장남인 서원(32)씨도 본격적인 경영 행보에 나섰다. 담씨는 카카오의 인공지능 자회사인 카카오엔터프라이즈에서 근무하다 지난 7월 오리온 경영지원팀 수석부장으로 입사했다. 손위로 누나가 있지만, 경영 승계 무게 추는 담 수석부장에게 기울었다.

그는 오리온의 경영 전략과 사업 계획 등을 수립하는 경영지원팀에서 오리온의 물류 고도화에 힘을 보태고 나섰다. 지난 4월 오리온이 카카오엔터프라이즈와 진행한 ‘물류 시스템 공동 구축을 위한 업무협약’에 담 수석부장이 실무자로 참여해 계약 등 진행을 주도했다.

담 수석부장은 특히 카카오엔터프라이즈 근무 경험을 기반으로 양사의 협약 추진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카카오엔터프라이즈가 보유한 AI 기반의 통합 물류 플랫폼인 ‘카카오 아이라스(Kakao i LaaS)’를 활용한 제품 공급 효율화 등 물류 최적화를 추진하고 있다.

허영인 SPC그룹 회장의 차남인 허희수(43) 부사장은 그룹의 핵심 사업을 모두 챙기고 나섰다. 지난해 11월 SPC그룹의 디지털사업 전문 계열사 섹타나인의 신규사업 책임임원에 오른 뒤 퀵커머스(즉시 배송), 메타버스 등 주요 사업을 모두 섹타나인으로 가져왔다.

최근에는 섹타나인 정관 내 사업목적에 ‘창업자, 중소기업 및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 ‘해외기업의 주식 또는 지분 인수 등 중소벤처기업부장관이 정하는 방법에 따른 해외투자’ 등을 추가했다. 스타트업 투자를 통해 그룹의 신성장 동력을 발굴한다는 계획이다.

재계 관계자는 “허 부사장은 2007년 파리크라상 상무로 입사해 파리크라상 마케팅본부장, SPC그룹 전략기획실 미래사업부문장 등을 지낸 그룹 내 신사업 전문가로 통한다”면서 “잘할 수 있는 부분에서 빠르게 성과를 내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허희수 SPC그룹 부사장. /SPC그룹 제공

전문가들은 식품업계 3세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하면서 이들이 어떤 성과를 내는지가 ‘안정적인 승계’ 작업의 핵심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기업이 규모를 갖춘 상황에서 나고 자란 3세들은 위기 시 생존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많기 때문이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경영권 승계의 핵심으로 오너일가의 지분 승계, 상속 재원 마련 방식 등이 주목받고 있지만, 사실 진짜 중요한 것은 경영능력 입증을 통한 승계 정당성 확보”라면서 “책임경영도 경영 능력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재계에선 미국 등 해외시장 공략 확대, 온라인 전환으로 요약되는 식품업계의 확장이 올해를 기점으로 본격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성장하는 시장으로의 공략이 경영 성과 입증에 유리하다는 판단에 식품업계 오너 3세를 해당 분야로 밀어주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경영 수업을 받던 3세들도 속속 본가로 복귀해 경영 수업에 돌입했다. 김정완 매일유업(267980) 회장의 장남 오영(35)씨가 대표적이다. 2014년 신세계백화점에 입사한 그는 신세계그룹과 신세계프라퍼티 등에서 재무 담당으로 근무했지만, 지난 10월 매일유업에 입사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오너 3세는 조기 교육과 유학 등을 통해 경영에 대한 전문지식과 해외 시장에 대한 이해도 등에서 오히려 선대보다 나을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면서 “선대보다 회사에 대한 애착이 떨어지더라도 경영 능력은 오히려 뛰어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