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기름을 묻힌 채 자동차 정비에 한창인 정비공이 땀을 닦아낸다. 좁은 독서실, 선풍기 한대에 의지해 공부하던 수험생은 굳은 얼굴로 한숨을 내쉰다. 편의점에 생수가 가득 든 상자를 운반하는 아르바이트생, 불 앞에서 웍(중식 전용 팬·Wok)을 달구는 요리사 모두 지친 기색이다.
이들은 자신을 응원하기 위해 찾아온 누군가와 오비맥주 카스 한캔, 한병을 부딪히며 하루의 시름을 달랜다. 검은 화면에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도 일상의 소중함을 지키는 모든 분들의 땀에 카스의 응원을 보낸다'는 문구가 뜨는 것으로 1분42초 짜리 광고는 마무리 된다.
경쾌하게 맥주를 따 잔을 부딪히고 목으로 꿀꺽 넘기는 시끌벅적한 맥주 광고의 클리셰(Cliché·자주 사용하는 진부한 표현)가 쏙 빠진 이 잔잔한 광고에 사람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내고 있다.
이 광고는 영화 해운대(2009), 국제시장(2014)을 흥행시키며 '쌍천만 감독(두개 작품이 1000만 관객을 돌파)'이란 수식어를 얻은 윤제균 감독의 CF 데뷔작이다. 오비맥주는 1994년 첫 출시 이후 2012년부터 국내 맥주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는 카스를 올해 초 투명병에 담은 '올뉴카스'로 리뉴얼 하면서 광고를 통해 '진짜가 되는 시간'이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오비맥주와 윤 감독의 협업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와 역대급 폭염으로 지친 국민들을 위로하는 광고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기존 맥주 광고에서 탈피한 새로운 광고를 만들고 싶었던 오비맥주는 그동안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수천만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인 윤 감독을 광고 제작자로 낙점했다.
윤 감독은 광고를 제작한 적이 없는 광고맨이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광고회사 LG애드(현 HS애드)에서 사회생활을 했지만 5년 중 4년을 전략기획팀에서 일해 직접 광고를 연출한 적은 없었다.
1998년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았던 때 무급휴직에 들어가면서 영화 시나리오를 쓴 것이 공모전에서 대상을 타며 영화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회사에서 윤 감독을 전략기획팀에서 광고제작팀 카피라이터로 발령내는 계기가 됐다.
오비맥주와의 인연도 LG애드에서 비롯됐다. 현재 오비맥주 광고 제작사인 온보드의 이현종 대표가 LG애드 시절 윤 감독의 사수다. 막내 카피라이터 였던 윤 감독을 하루종일 혼내며 가르친 인생 선배다. 막내 시절 어떤 광고를 만들고 싶냐는 사수의 질문에 윤 감독은 "관객이 울컥하는 광고를 만들고 싶다"고 대답했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모범답안은 '광고주와 제품의 이미지를 극대화 하는 광고' 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 감독은 광고회사에서 현실화 할 수 없었던 생각을 영화판에서 이뤄냈다. 두사부일체(2001), 색즉시공(2002), 낭만자객(2003)을 연달아 흥행시키며 가장 성공한 영화감독 중 한명이 됐다. 이현종 대표가 '진짜 멋진 여름 맥주 광고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을 때 흔쾌히 수락한 것도 "현실에서 흘리는 땀의 가치와 소중함을 이야기 하고 싶다"는 방향성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오비맥주 카스의 주력 고객층이자 이 광고에 등장하는 2030세대에 대해 윤 감독은 '상실의 세대'라고 정의했다.
지난 11일 서울 강남구 JK필름 본사에서 만난 그는 "영화 국제시장 속 할아버지 세대보다는 요즘 젊은 세대가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솔직히 가졌다"며 "하지만 많은 젊은 친구들을 만나며 내 생각이 잘못 됐다고 느꼈다. 기회의 부재에서 오는 박탈감이 내 생각보다 훨씬 큰 세대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다음은 윤 감독과의 일문일답.
-광고에 등장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요리사, 수험생 등 특정 직업군을 설정한 이유가 있나.
"광고 제작 과정에서 회의를 가장 많이 했던 부분이다. 일하는 젊은 친구들의 땀을 표현하고 응원하고 싶은데 수천, 수만가지 직종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 지가 제일 어려웠다. 용광로 앞에서 작업하는 사람이나 스포츠 선수들을 내세울 수도 있었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 공감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블루칼라, 화이트칼라 어느 한쪽만 대표해서도 안되고 우리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직업들, 무난한 직업들로 최종 결정했다."
-광고에 등장하는 요즘 2030세대를 정의한다면.
"상실의 세대다. 나의 아버지 세대, MZ세대의 할아버지 세대와 비교하면 지금의 MZ세대는 먹고 살만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복받은 세대 아닌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수많은 젊은 친구들을 만나면서 내 생각이 잘못됐구나 느꼈다. 윗세대는 자기가 일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았다. 요즘은 기회의 부재에서 오는 박탈감이 내 생각보다 훨씬 크다고 느꼈다. 개천에서 용나기도 어렵다. 꼰대처럼 뭘 가르치고 싶은 생각은 없고 그냥 응원해주고,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2시간이 넘는 영화를 찍다가 15초, 1분짜리 광고를 찍으려니 힘들지 않았나.
"광고에 나오는 장소가 네군데인데 하루만에 찍었다. 각 장소마다 촬영시간이 딱 2시간이었다. 영화감독 이든 CF감독 이든 처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나. 영화는 개봉이 계속 연기되고 있는데, 광고는 촬영하고 1~2주 있다가 결과물이 나오고 본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과정이 너무 다이나믹 하고 즐겁고 행복했다. 광고에 있어서는 신인감독이나 마찬가지다. 영화는 관객 수, 평론가 별점이 있는데 광고는 어떤 시스템인지 전혀 모른다.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한 결과물이었으면 좋겠다."
-윤제균 감독 영화에도 술이 종종 등장한다. 술은 영화에서 어떤 도구인가.
"이현종 대표가 쓴 카피처럼 '진짜가 되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술이 약하지만 한두잔 마셨을 때 속내를 털어놓고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알수 있어서 좋아한다. 내 영화에도 술 마시고 말도 안되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많다. 관객 입장에서도 술 마시고 한번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감정 이입이 된다. 과음만 하지 않는다면 사람 사이를 좀 더 진짜로 만들어주는 좋은 매개체가 아닐까."
-코로나19로 특히 어려웠던 산업 중 하나가 영화계였다.
"평생 살면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영화 영웅을 작년 초에 다 찍어놨고 작년 여름에 개봉 예정이었다. 지금 1년이 넘도록 개봉을 못하고 있다. 영화가 잘돼야 그 흥행 수익으로 영화사를 운영하고 새로운 작품을 기획하는데 모든 제작사가 수입이 없다. 극장에 사람들이 가지 않으니 영화계가 직접적인 타격을 많이 받았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이 집에서 OTT로 영화보는 것에 익숙해졌다. 영화업계엔 위기 아닌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스포츠 중계를 보더라도 집에서 혼자 보는 것과 누군가와 같이 보는 것은 체감이 다르다. 영화도 집에서 큰 화면으로 혼자 보는 것과 100명, 200명이 모여 숨 죽여 보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인간은 싫증을 잘 내는 동물이기도 하다. TV랑 OTT로 영화를 편안하게 보다가도 오래 되면 싫증을 분명 낼 것이다. 새로운 공간,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공간에서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욕구가 생기지 않을까. "
-개봉 예정인 영화 영웅에 대해 소개해달라.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 영웅을 영화화한 것이다. 뮤지컬을 보고 감동을 많이 받아서 우리나라 최초 뮤지컬 영화에 힘들지만 도전하게 됐다.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3배 이상 힘들었다. 국제시장을 찍을 때보다 힘들었다. 후시(後時)녹음을 했으면 편했을텐데 라이브로 가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기 때문에 괴로움이 시작됐다."
-CJ ENM과 K팝 영화를 제작한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윤제균 감독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재미와 감동 요소가 복합된 그런 전개라고 기대하면 될까.
"사람은 잘 안변하지 않을까. 다만 신인감독의 심정이다. 광고쪽에서 내가 신인감독이었듯 세계 시장을 겨냥한 작품은 처음이다. 겸허한 자세로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이다. 잘해야 겠다는 부담감이 크다. 내년 상반기부터 촬영을 해서 내후년 정도에 개봉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세계 케이팝 팬들의 기대감이 크다.
"이 작품을 준비한지는 제법 됐다. 조사, 연구를 하다보니 전세계적인 케이팝 신드롬을 우리 국민만 잘 모르는 것 같다. 상상을 초월한다. 지금의 BTS는 예전 비틀즈보다 팬덤이 더하다고 한다. 한국 케이팝 가수들이 어린 친구들이지만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애국자들 아닌가 싶다. BTS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잘 모르지만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은 케이팝 그룹이 너무 많다. 그 친구들이 해외에 진출하면서 국가 브랜드 향상에 이바지한 걸 돈으로 환산하면 어마어마할 것 같다."
-누가 출연할 지에 대한 관심도 높은데.
"지금 시점에선 아무도 모른다. 한국 영화라면 내가 자신있게 캐스팅을 해서 갈수 있는데 미국 시장이 주요 시장이다 보니 그쪽 의견도 반영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에선 인기 있는 인물이라면 고려를 해볼 수도 있다. 미국 쪽하고 상의를 많이 해서 진행하려 한다."
-앞으로 한국 영화사에 윤제균 감독은 어떤 감독으로 기록되고 싶나.
"많은 사람들한테 진짜 행복을 줬던 감독이고 싶다. 나는 겁이 많아서 공포물이나 잔인한 작품을 잘 못본다. 20년 넘게 영화를 했는데 대부분 따뜻한 영화들이다.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 긍정적인 에너지와 행복을 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윤제균 감독은 누구
윤제균 감독은 1969년 부산 출생으로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광고회사 LG애드에서 일하다 태창흥업 주최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2001년 두사부일체 각본·연출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감독을 맡았던 주요 작품은 △색즉시공(2002년) △낭만자객(2003년) △1번가의 기적(2007년) △해운대(2009년) △국제시장(2014년) △영웅(2020년)이다. 지난 2010년 영화 해운대로 제4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 2015년 영화 국제시장으로 제52회 대종상 감독상,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