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창립 목표는 패션을 민주화하고, 매일 전 세계 수백만 명에게 감동을 주는 패션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기술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동력일 뿐, 결코 우리 사업의 인간적 요소를 대체할 수 없다."
3월 3일(이하 현지시각) 오전 10시 스페인 갈리시아주 아르테이쇼 인디텍스 본사에서 만난 오스카 가르시아 마세이라스(Óscar García Maceiras·51) 인디텍스 최고경영자(CEO)는 인공지능(AI) 시대 패션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했다. 첨단 기술이 산업 전반을 바꾸고 있지만, 패션의 중심에는 결국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법률가와 은행가 출신인 그는 2021년 인디텍스 법무 총괄로 합류한 뒤 그해 11월 CEO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 4월 회장에 취임한 창업주 아만시오 오르테가(Amancio Ortega·90)의 막내딸 마르타 오르테가(Marta Ortega·42) 회장과 함께 인디텍스의 '2세 경영' 시대를 연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두 사람의 리더십 아래 인디텍스는 뚜렷한 성과를 냈다. 취임 첫해인 2022 회계연도(2022년 2월 1일~2023년 1월 31일) 순이익이 27% 증가한 데 이어, 최근 발표한 2025 회계연도(2025년 2월 1일~2026년 1월 31일)에도 매출과 순이익 모두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이날 처음 한국 언론과 마주한 마세이라스 CEO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인디텍스의 생존 전략과 미래 구상을 밝혔다.
◇2세 경영 성공적 안착, 창립 이념 '패션 민주화' 계승
마세이라스 CEO는 리더십 변화의 의미를 먼저 짚었다. 그는 2022년부터 본격화한 2세 경영에 대해 "창업주 가족이 경영 전면에 나선 것은 사업의 지속성과 창업주의 유산, 중장기 비전을 위해 고무적인 일"이라며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면서 지속 가능하게 성장하는 것이 우리 목표"라고 했다. 이어 "매일 사람을 설레게 하고, 협력사 및 주주와 강한 파트너십을 유지하며, 양질의 일자리를 만드는 기업이 되겠다"고 덧붙였다.
그가 강조한 인디텍스의 유산은 1975년 창업 당시부터 이어져 온 '패션의 민주화'다. 디자인과 아름다움이 일부의 전유물이던 시절, '누구나 패션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아만시오 오르테가의 비전은 '자라(Zara)'의 출발점이었고, 지금도 인디텍스를 떠받치는 뿌리로 남아 있다.
마세이라스 CEO는 "고객의 요구에 끊임없이 대응하면서도 디자인과 품질의 원칙을 지키고, 지속 가능한 패션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는 우리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며 "전 세계 누구나 패션을 누리게 하는 것이 우리의 변하지 않는 가치"라고 말했다.
◇AI는 도구일 뿐, 패션의 '인간적 연결' 대체 못 해
인디텍스는 통합 공급망 시스템인 IOP (Inditex Open Platform)를 통해 전 세계 98개국, 약 5500개 매장과 온라인 채널의 재고를 실시간으로 관리한다. 정확한 수요 예측과 반응 생산 덕에 재고율은 1% 미만으로 유지되고 있다. 2025 회계연도 매출이 약 12% 증가하는 동안 재고 자산은 오히려 0.7% 줄었다. 많이 팔면서도 재고를 낮추는 '저재고·고효율' 구조를 완성한 셈이다.
하지만 마세이라스 CEO는 기술을 맹신하기보다 주체적으로 활용하는 태도를 강조했다. "매장 한 곳만 운영하던 시절, 기술이란 창업주가 직접 매장을 찾아 직원에게 고객 반응을 묻는 일이었다. 매장이 늘자, 전화와 팩스가 이를 대신했고, 지금은 디지털 대시보드가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기술을 활용하는 데 능숙한 회사였다."
공정관리와 온라인 앱의 가상 피팅 등에서 AI를 적극 활용하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고객 경험을 높이기 위한 도구라는 설명이다. 그는 "패션은 고객이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자신을 실현하게 돕는 일"이라며 "그 감정적이고 인간적인 연결은 AI가 대신할 수 없다. AI는 팀의 목표 달성을 돕는 지원군이지, 우리 사업의 본질인 인간적 가치를 대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벨기에 건축가 빈센트 반 두이센(Vincent Van Duysen)이 설계한 바르셀로나 자라 디아고날 매장은 이런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겉으로는 세련된 공간 미학을 구현하면서도, 이면에는 스마트 피팅 룸과 무선주파수식별(RFID) 기술 기반 무인 결제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이 인디텍스가 지향하는 기술의 활용법이다.
◇주 2회 신제품 공급…물류 인프라에 18억유로 쏟은 이유
인디텍스의 독보적 경쟁력은 전 세계 매장에 주 2회 신제품을 공급하는 속도에서 나온다. 이는 스페인 내 11개 물류센터를 축으로 한 직접 통제형 물류 인프라가 있기에 가능하다. 인디텍스는 2024년과 2025년 각각 9억유로씩, 총 18억유로(약 3조원)를 물류 인프라 구축에 투입했다.
마세이라스 CEO는 "아무리 뛰어난 제품이 있어도 고객이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전달하지 못하면 비즈니스 모델은 작동하지 않는다"며 "물류 역량과 모델의 견고함을 유지하려면 기술과 물리적 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필수"라고 말했다. 또한 이번 투자가 단순한 시설 확충이 아니라 직원 경험과 지속 가능성까지 키우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韓은 글로벌 트렌드 거점"… 8월 자카페 2호점 개점
올해 한국 진출 18년 차를 맞은 인디텍스는 자라, 마시모두띠, 자라홈 등 총 45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 명동 눈스퀘어 자라 매장에 전 세계 네 번째이자, 아시아 최초의 식음(F&B) 매장 '자카페'를 도입했고, 아더에러, 앤더슨벨 등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와 협업 제품도 선보였다.
마세이라스 CEO는 한국을 "글로벌 트렌드 창출의 핵심 거점"으로 평가했다. 그는 "한국 고객은 세계 트렌드를 이끄는 리더"라며 "한국에서 시작한 협업 프로젝트가 글로벌 프로젝트로 확대되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인디텍스는 올해 한국 시장 공략에 더 속도를 낸다. 7월 말 서울 용산구에 마시모두띠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고, 8월에는 강남대로 자라 매장을 확장 이전하며 자카페 2호점을 선보일 예정이다. 마세이라스 CEO는 "올가을 한국 방문도 계획하고 있다"며 기대를 내비쳤다.
그는 마지막으로 패션 산업에 도전하는 젊은 세대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패션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아름다움 그 자체다. 창의성과 혁신에 대한 비전을 잃지 말아야 한다. 매일 자신의 안전지대(zona de confort)를 벗어나는 것, 그것이 계속 전진하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