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주의 항구도시 아르테이쇼. 대서양의 거친 바람이 닿는 이곳에 SPA(제조·유통 일원화) 브랜드 '자라(Zara)'를 운영하는 글로벌 패션 그룹 인디텍스(Inditex) 본사가 있다. 축구장 24개 규모(17만㎡)의 자라 영업·디자인센터를 비롯해 현대식 건물들이 녹지와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실리콘밸리의 테크 캠퍼스를 연상케 했다.
인디텍스는 독자적인 정보기술(IT) 플랫폼을 기반으로 전 세계 약 5500개 매장 재고 관리를 수직 계열화해 '패션 제국'을 일궜다. 지난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발표한 '2025 미래 준비 지표'에서는 에르메스를 제치고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에 이어 패션 부문 2위에 올랐다. 2022년 13위에서 수직 상승했다. '이코노미조선'은 3월 2일(이하 현지 시각) 인디텍스 본사를 찾아 혁신의 현장을 확인했다.
◇ 파티션 없는 사무실, 수평적 생태계 구축
본사에 들어서자, 탁 트인 개방감이 느껴졌다. 400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사무실은 흔한 칸막이 하나 없었다. 통창 너머로 들어오는 자연광 아래 디자이너와 영업 직원이 오가며 의견을 나눴다. 인디텍스 관계자는 "모든 부서가 자유롭게 소통하도록 파티션 없는 사무실을 꾸렸다"며 "창업주 아만시오 오르테가(Amancio Ortega)의 철학이 반영된 것으로, 디자인부터 물류까지 전 과정을 수평적으로 연결한 자족형 생태계를 지향한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소통 구조는 '자라닷컴(Zara.com)' 을 운영하는 이커머스 조직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무실 중앙의 대형 대시보드에는 전 세계 고객의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표시됐다. 국가별 접속자 수와 인기 상품 순위, 장바구니 담기와 결제 현황 등이 3분마다 업데이트됐다. 이 데이터는 수치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의사 결정으로 이어졌다.
◇ 매주 두 번 신제품이 매장에 깔리는 비결은
자라는 매주 두 차례 신제품을 출시한다. 연간 100회 이상 '미니 시즌'을 운영하는 셈이다. 통상 패션 업계가 계절별로 네 차례 신상품을 내놓는 것과 대조적이다. 비결은 생산·유통·판매를 하나로 묶은 수직 계열화와 적기 공급 생산방식에 있다.
업계에 따르면, 자라가 연간 출시하는 제품 디자인 수는 2만여 개다. 전체 물량의 절반은 트렌드 변화를 살핀 뒤 디자인을 확정해 2~3주 만에 매장에 내놓는다. 인기가 많아도 추가 생산은 하지 않는다. 대신 약간의 변화를 준 다른 모델을 선보인다. 인디텍스 관계자는 "고객은 남과 다른 옷을 입길 원한다. 현재 봄·여름 물량의 50%가 생산됐으며, 나머지는 고객 반응에 따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디텍스는 물량의 절반 이상을 스페인과 인근 국가에서 생산하고, 이를 스페인 내 11개 물류센터에서 통합 관리한다. 매주 두 번 신제품 출시를 위해 필요하면 항공 배송도 동원한다.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회사 측은 이런 전략이 오히려 최고의 효율을 이끌어낸다고 설명했다. 기민한 생산 체계 덕분에 시즌 도중에도 제품을 수정·보완할 수 있는 민첩성이 확보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라는 물론 마시모두띠, 버쉬카, 풀앤베어, 스트라디바리우스, 오이쇼, 자라홈, 레프티스 등 인디텍스 8개 브랜드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 재고율 0.6%의 비밀, '인디텍스 오픈 플랫폼'
인디텍스의 경쟁력은 수치로 입증된다. 지난해 인디텍스의 시즌 종료 후 미판매 재고율은 0.6%였다. 1000벌 중 6벌만 남기고 모두 적기에 팔았다는 뜻이다. 업계 평균 재고율이 10~20%인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수치다. 2025 회계연도 매출이 3.2% 증가하는 동안 재고 자산은 오히려 0.7% 줄었다. 제값을 받고 파는 덕에 매출 총이익률은 58.3%에 달했다.
'저재고·고효율' 구조의 핵심은 자체 통합 공급망 시스템인 '인디텍스 오픈 플랫폼(IOP·Inditex Open Platform)'에 있다. 2018년 도입한 IOP는 전 세계 5500여 개 매장과 온라인 채널의 재고, 구매, 유통, 주문 등의 프로세스를 실시간으로 연결한다. 옷에 달린 무선주파수식별(RFID) 칩을 통해 어디서든 재고 현황을 파악하고, 수요를 예측한다. 이 데이터 분석은 단독으로 활용되는 게 아니라, 트렌드에 대한 정성적 분석과 700여 명 디자이너의 상업적 직관과 함께 작동한다.
인디텍스 관계자는 "IOP 개발 과정에서 가장 중점을 둔 건 '애그노스틱(Agnostic) 멀티 모델 아키텍처'를 통해 특정 기술에 얽매이지 않고 기술적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며 "마이크로 서비스 구조를 채택해 시스템 전체를 개편하지 않고도 각 부서의 세부적인 요구 사항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플랫폼 경쟁력을 갖췄다"고 설명했다.
IOP는 그룹의 지속 가능성을 키우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펠릭스 포자(Félix Poza) 지속 가능성 부국장은 "인디텍스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과잉생산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며 "인공지능(AI)과 기술 도구가 더해져 효율이 극대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인디텍스는 2040년까지 탄소 중립(net zero·탄소 순 배출량이 '0'이 되는 상태) 달성을 목표로 한다.
◇ 가상 피팅부터 물류 로봇까지… 고객 경험 높이는 AI
기술은 고객 경험 전반에도 촘촘하게 활용된다. 이커머스 물류센터에서는 주문이 들어오는 즉시 자율주행 로봇(AMR)과 멀티 셔틀(Shuttle System)이 제품을 찾아오고, 옷을 개거나 상자를 접는 것도 자동화했다. 사람은 옷을 종이로 감싸 상자에 넣는 섬세한 업무에 집중한다.
지난해 말엔 자라 온라인몰에 생성 AI (Generative AI) 기반 '가상 피팅(Try-On)' 서비스를 도입했다. 일각에선 이 서비스가 반품률을 10%가량 낮췄다는 분석이 나온다. 티지아나 판돌피(Tiziana Pandolfi) 자라 이커머스 총괄은 "가상 피팅의 목적은 기술 과시가 아니라 고객이 쇼핑을 쉽고 즐겁게 하는 데 있다"며 "같은 옷이라도 사이즈별로 핏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확인할 수 있는 2단계 버전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향후 자라 온라인몰에는 챗GPT 같은 대화형 어시스턴트도 탑재될 예정이다. 그룹의 모든 AI 전략은 '확장성, 보안, 기술적 독립성'이라는 원칙에 따라 추진된다.
인디텍스는 2025 회계연도에 매출 399억유로(약 68조원), 순이익 62억유로(약 10조원)로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아르테이쇼에서 만난 구성원들은 기술보다 '혁신의 태도'를 강조했다. 라울 에스트라데라(Raúl Estradera) 커뮤니케이션 총괄 책임자(CCO)는 "우리는 창립 초부터 패션 유통에서 '파괴적인 구상'을 갖고 출발했고, 최신 기술을 비즈니스 모델에 적용해 왔다"며 "혁신은 우리의 존재 방식 그 자체"라고 말했다.
3월 3일 인디텍스 본사 복도에서 마주친 아만시오 오르테가 인디텍스 창업주는 주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통화하고 있었다. 직원의 귀띔이 없었다면, 자라 제국을 건설한 '왕 회장님'이란 걸 알아채지 못할 만큼 소탈한 모습이었다. 1975년 자라를 창업한 그는 2021년 막내딸 마르타 오르테가(Marta Ortega)에게 회장직을 물려 준 뒤에도, 지분 59% 보유한 최대 주주로 여전히 칸막이 없는 사무실에 출근하며 그룹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4세에 셔츠 가게 배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의류 생산과 유통의 비효율을 목격했고, 1975년 스페인 아코루냐에 SPA 사업 모델을 적용한 자라 1호점을 열었다.
그의 경영 철학은 '패션 민주화'와 '침묵 경영'으로 요약된다. 광고보다 매장 입지와 물류에 투자했고, 화려한 이미지보다 제품과 고객에게 집중했다. 평소 넥타이도 매지 않고 직원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는 그는 2001년 상장 전까지 단 한 차례도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상장 후에도 언론 노출을 극도로 자제했다. 2026년 기준 추정 자산은 1100억~1200억유로(약 188조~205조원)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과 더불어 유럽을 대표하는 거부이자, 스페인 최고 부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