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수동 아이아이컴바인드 신사옥 1층 '하우스 노웨어' 전경. /김은영 기자

서울 성동구 성수동 낡고 낮은 건물들 사이로 우주선처럼 우뚝 솟은 콘크리트 건물이 연일 화제를 모은다. 안경 브랜드 '젠틀몬스터'로 유명한 아이아이컴바인드가 지난 6일 개장한 신사옥이다.

지난 9일 방문한 신사옥은 건물 바깥부터 사진 촬영하는 방문객들로 인산인해였다. 연면적 3만700㎡(약 9290평), 지상 14층 규모의 건물은 저층부와 중충부, 고층부가 각기 다른 형태의 건물 3개를 쌓아 올린 듯했다. 김찬중 건축가가 이끄는 더시스템랩이 설계했다. 회사는 신사옥 개장에 앞서 할리우드 배우 틸다 스윈튼을 모델로 한 미래적인 영상도 선보였다.

건물 1층에 들어서자, 귀를 펄럭이며 잠을 자는 초대형 닥스훈트와 로봇 설치물이 보인다. 방문객들을 따라 사진을 찍고 나서야 향수 진열대가 눈에 들어왔다. 회사 관계자는 "'선샤인'이라는 닥스훈트가 갑옷을 입고 숲속을 질주하는 꿈을 꾸는 스토리를 향으로 담았다"며 "로봇들은 회사가 추구하는 '퓨처 리테일'이라는 방향성을 표현한다"고 설명했다.

2,3,5층에도 비슷한 광경이 펼쳐졌다. 예술 작품 같은 조형물과 로봇 사이로 안경 '젠틀몬스터', 뷰티 '탬버린즈', 모자 '어티슈', 식음료(F&B) '누데이크', 식기 '누플랏' 등 회사의 전 브랜드 제품이 어우러졌다. 방문객들은 매장 곳곳을 누비며 사진을 찍고, 제품을 들어봤다. 누플랏의 컵엔 빨간 손톱 모양의 장식이 달려있어, 손가락을 고리에 끼워 넣으면 실제 손톱처럼 연출할 수 있었다. 이 제품은 온라인 몰에서 금세 동이 났다.

한 방문객은 "로봇과 설치 작품을 구경하다 굿즈(기념품)를 사서 나오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서울 성수동에 들어선 아이아이컴바인드 신사옥. /김은영 기자

◇ 젠틀몬스터의 '퓨처 리테일' 전략

16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2011년 안경 브랜드 젠틀몬스터를 출범한 아이아이컴바인드는 한국인의 얼굴형에 맞춰 디자인한 선글라스를 수입 명품보다 낮은 20만~30만원대에 출시해 호응을 얻었고, 2014년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배우 전지현이 착용하면서 인지도가 상승했다.

높아진 인지도는 예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공간 전략이 더해지며 시너지가 났다. 이른바 '퓨처 리테일(미래 유통)' 전략이다. 회사는 기존 유통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예술, 디자인, 상업 공간을 융합한 매장을 미래형 매장이라 정의했다.

목욕탕, 만화방 등을 주제로 체험형 공간을 선보인 데 이어, 공상과학 영화에서 볼 법한 움직이는 오브제와 로봇을 매장에 들였다. 이를 위해 회사는 2017년 애니매트로닉스(Animation과 Electronics의 혼성어, 전기 기계 장치를 이용해 조형물이 실물처럼 동작하도록 구현하는 기술) 업체 위저드를 인수해 직접 공간을 채울 조형물을 만들었다. 2019년에는 중국 백화점 SKP가 젊은 층을 겨냥해 만든 백화점 SKP-S의 인테리어도 맡았다.

2015년 573억원이던 매출은 지난해 7891억원으로 늘었다. 중국, 대만, 싱가포르, 일본, 미국, 영국 등에서도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는데, 해외 매출이 3000억원이 넘었다. 영업이익률은 약 30%로 패션업계 평균 영업이익률(6~7%) 크게 웃돌았다.

서울 성수동 '하우스 노웨어' 2층 '젠틀몬스터' 매장에 설치된 대형 조형물. /김은영 기자

◇ 작품 설치 위해 인근 꼬마 빌딩 허물기도

회사가 처음부터 공간에 공을 들인 건 아니다. 창업자인 김한국 대표는 초창기 고객의 집으로 안경을 보내주는 '홈 트라이(HOME TRY)' 전략을 구사했다. 안경 샘플 다섯 개를 보낸 후 마음에 드는 안경을 구매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재고 부담이 컸고, 안경을 돌려받기도 어려웠다. 두 번째로 선보인 가상 피팅 프로그램도 실패로 돌아갔다. 소비자들이 홈페이지에 자신의 사진을 올리는 걸 꺼렸던 탓이다.

결국 김 대표는 기능적 역할만 수행하는 도구로서의 안경이 아닌, 패션과 결합한 안경으로 브랜드 정체성을 바꾼다. 이어 경험을 파는 유통 공간을 선보여 고객들을 줄 세웠다.

성수 신사옥에 꾸려진 유통 공간은 유통의 미래가 제품이 아닌, 세계관에 있다는 퓨처 리테일 전략을 극대화했다. '어디에도 없는 공간'이라는 의미로 '하우스 노웨어'라는 이름도 붙였다. 중국 상하이, 선전, 베이징에 이어 한국에선 이번에 처음 선보인다.

서울 성수동 아이아이컴바인드 신사옥 옆에 설치된 막스 지덴도프의 작품. 회사는 이 작품을 설치하기 위해 꼬마빌딩을 허무는 조건으로 임대했다. /김은영 기자

건물 밖 예술 작품의 설치 과정도 화제를 모았다. 원래 꼬마빌딩이 있었지만, 회사는 작품 설치를 위해 빌딩을 허무는 조건으로 보증금 5억원에 월세 4000만원을 주고 공간을 임대했다. 까만 쓰레기 봉지 더미 위로 황금빛 쓰레기 봉지를 쥔 노인 조형물은 독일인 예술가 막스 지덴도프의 설치 작품이다. 회사는 일상에 숨겨진 경이로움의 순간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이승윤 건국대 경영학부 교수는 "소비자가 회사 사옥이 어딘지까지 아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아이아이컴바인드는 전략적으로 성수동을 택하고, 사옥 자체를 이슈화해 마케팅에 활용했다"며 "이 회사가 어떤 식으로 공간을 바라보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공간은 살아 숨 쉬는 생물과도 같다"라며 "소비자 반응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해야 하는데, 젠틀몬스터는 공간 전략을 내재화하는 등 로직을 잘 만들었다. 이런 전략이 장기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선 얼마나 디테일하고 차별화하느냐가 중요하다"라고 했다.

아이아이컴바인드는 앞서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글로벌 안경 제조·유통업체 룩소티카의 투자를 받은 데 이어, 지난 6월 구글이 회사 지분 4%를 1450억원에 확보했다. 내년엔 구글과 스마트 안경을 출시할 예정이다. 업계에 따르면 아이아이컴바인드는 가상현실(VR) 게임 관련 사업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일 서울 성수동 '하우스 노웨어'에서 로봇과 함께 사진 찍는 방문객들. /김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