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도 데상트코리아 대표가 12년 만에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에 패션계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김 대표는 이달 초 경영 회의에서 오는 3월 말일 자로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요, 업계에선 일본 제품 불매 운동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실적 부진이 계속되자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현지화 전략'으로 스포츠 의류 업계 3위 올라
김 대표는 국내 스포츠 의류·용품 업계에선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회사가 설립된 2000년 데상트 기획팀장으로 입사해 10년 만에 대표이사에 오르며 데상트코리아의 성공을 이끌었다는 평을 얻었죠.
2000년 국내 시장에 진출한 데상트코리아는 데상트골프·르꼬끄스포르티브·르꼬끄골프·먼싱웨어·엄브로 등의 브랜드를 라이선스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본 데상트가 지분 100%를 갖고 있습니다.
1935년 일본에서 설립한 데상트는 스키복을 시작으로 유럽 국가대표 팀복을 후원해 명성을 얻었습니다. 국내 진출 후엔 스포츠 의류 용품 시장의 성장을 타고, 나이키, 아디다스에 이어 업계 3위로 성장했죠. 16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데상트코리아의 매출은 2002년 207억원에서 2018년 7270억원으로 뛰었습니다. 설립 이래 18년 연속 성장을 기록한 것인데, 한국 소비자에게 맞는 '현지화 전략'이 주효했다는 분석입니다.
김 대표는 직원들에게 늘 현지화 전략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스포츠 전문 의류라는 인식이 강한 데상트를 국내에 들여와 패션성이 강한 스포츠 의류로 재설계해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지금은 '국민템(국민 아이템)'이 된 롱패딩(벤치 파카)의 유행을 처음 주도한 것도 데상트였죠.
공격적인 스포츠 마케팅으로 브랜드 인지도도 높였습니다. 야구 국가대표팀을 비롯해 육상, 스키, 카누 등 다양한 종목의 스포츠 단체를 후원해 스포츠 전문 브랜드라는 인식을 굳혔죠.
그 결과 한국 매출이 일본 본사를 먹여 살리는 수준에 이릅니다. 일본 데상트는 1998년 매출의 40%를 차지하던 아디다스의 라이선스 사업을 중단한 후 경영 위기에 직면했지만, 2000년대 들어 한국 사업이 날개를 달면서 숨통이 트였습니다.
◇일본 매출 앞질렀지만, 노재팬·코로나가 발목
2015년 한국 매출이 일본을 앞지릅니다. 김 대표도 그해 데상트 일본 본사의 상무이사로 이름을 올리며 그룹 내 영향력을 높입니다. 2016년엔 일본 데상트, 중국 안타 그룹과 함께 3자 합작회사 데상트글로벌리테일을 세워 중국 시장에도 진출했죠. 회사의 성장과 함께 직원들의 몸값도 올라, 스포츠 의류 업계에선 '데상트 출신'이면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2019년 일본 불매 운동이 발발하며 성장에 빨간불이 커졌습니다. 그해 매출은 6156억원, 영업이익은 90억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15.3%, 86.7% 급감했습니다.
설상가상 2020년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위기감은 더 커졌습니다. '집콕' 생활의 장기화로 스포츠 의류 및 운동화 판매가 저조해지면서 그해 매출이 4986억원으로 떨어졌고, 창사 이래 처음 영업 손실을 기록합니다.
데상트코리아는 내실 경영에 돌입했습니다. 2019년 말 969개였던 매장을 작년 9월 말 기준 832개로 줄이고, 마케팅 활동도 축소했습니다. "한국 의존도를 낮추자"는 일본 본사의 방침에 따라 중국 사업도 활발히 펼칩니다.
다행히 작년 실적은 상당 부분 개선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일본 데상트 본사가 최근 발표한 실적 발표에 따르면 작년 한국 데상트 매출은 약 519억엔(약 5400억원)으로 전년 대비 10% 가까이 성장했고, 영업이익은 약 19억엔(약 197억원)으로 흑자 전환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작년 말엔 데상트코리아가 실적 회복 기조에 힘입어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죠.
실적 반등엔 성공했지만, 김 대표는 20여 년간 키운 회사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후임 대표는 손승원 부사장으로 내정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패션업계에 따르면 김 대표는 새로운 사업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일각에선 공격적인 브랜드 출시와 마케팅으로 매년 두 자릿수씩 고속 성장하며 회사를 꾸려온 김 대표가 내실 위주의 경영을 원하는 일본 본사의 요구에 답답해 했다는 증언도 나옵니다. 코로나 사태 직전 김 대표가 가장 공들인 사업도 600억원을 투자해 부산 지역에 세계 최대 신발 연구·개발(R&D) 센터를 건립한 것이었죠. 패션계가 김 대표의 다음 행보를 주목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