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명품에 관심이 없습니다. 브랜드 사업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최근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만난 정준호 롯데지에프알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2019년 1월 롯데쇼핑(023530) 패션 자회사의 수장이 된 그는 3년 여의 조직 재정비 끝에 새로운 청사진을 내놨다. 정 대표는 롯데가 운영하던 10여 개의 수입 브랜드를 정리하고, 애슬레저(Athleisure·일상에서 입는 운동복)와 뷰티를 신성장동력으로 내세웠다. 올 상반기 영국 화장품 샬롯틸버리(Charlotte Tilbury)를 출범한 데 이어, 내년엔 프랑스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까웨(K-WAY)와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카파(KAPPA)를 라이선스 방식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전 세계적으로 연평균 6% 이상 성장하는 애슬레저 시장의 성장성에 주목했다는 게 정 대표의 설명이다.

정준호 롯데지에프알 대표. /롯데지에프알

신세계인터내셔날(031430)에서 해외사업을 담당해 온 그는 아르마니, 몽클레르, 돌체앤가바나, 메종마르지엘라, 크롬하츠, 어그 등 30개가 넘는 해외 유명 브랜드를 국내에 유치해 성공시켰다. 글로벌 명품업계에선 한국에 진출하려면 “미스터 정을 통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런 그가 롯데에 영입되자 유통업계에선 롯데가 명품 사업을 확대할 거라는 관측이 많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 명품 대신 ‘ABC 전략’으로 롯데 패션 키운다

카파와 까웨는 각각 이탈리아 토리노, 프랑스 파리에서 탄생한 스포츠 브랜드다. 1916년 출범한 카파는 이탈리아 축구팀 유벤투스의 유니폼과 남녀가 등을 맞댄 ‘오미니’ 로고로 유명하고, 1965년에 출시된 까웨는 세계 최초로 바람막이(윈드 브레이커) 재킷을 선보였다. 까웨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어 사전에 ‘접어서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바람막이’를 칭하는 일반명사로 등재됐다.

두 브랜드는 앞서 다른 전개사를 통해 국내에 출시된 적이 있다. 그런 만큼 옛 이미지를 지우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브랜딩 작업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를 위해 정 대표는 명품 브랜드의 성공 문법을 적용했다. 파산 직전이던 몽클레르가 외부 크리에이터들과 협업해 브랜드를 혁신하고 젊은 고객을 끌어들였듯, 한국의 유망 디자이너와 브랜드를 재정립해 해외까지 진출한다는 구상이다. 카파의 경우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주목한 지호영 디자이너와 걸그룹 블랙핑크의 무대 의상을 제작한 본봄 디자이너를 영입해 각각 메인 상품과 캡슐 컬렉션(브랜드 이미지를 강조한 소규모 컬렉션)을 선보인다.

내년 2월부터 국내 시장에 전개하는 카파. /롯데지에프알

정 대표는 “수십 년간 수많은 명품을 국내에 들여오면서 한국의 패션을 키우지 못했다는 부채감 같은 것이 있었다. 해외에서 성공한 브랜드를 국내 소비자에게 소개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한국의 창의성(Creativity)을 접목해 글로벌 브랜드를 키우고, 한국 패션을 세계에 알리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실제로 우리가 만든 옷과 그래픽을 보면 구찌, 돌체앤가바나 등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수준이 높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K팝과 영화, 뷰티 등에 이어 한국 패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다. 초기 한국 기업과 손잡고 국내 시장에 진출했던 명품 기업들도 직진출로 선회해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그런 만큼 정 대표는 ‘한국에서 디자인한 옷’으로 겨뤄야 승산이 있다고 본다. 이에 명품 대신 ‘A(애슬레저)·B(뷰티)·C(컨템포러리) 포트폴리오’ 전략을 내세우고, 각 사업군에 맞는 브랜드를 키울 계획이다. 올 연말엔 새로운 화장품 브랜드를 추가하고, 2023년에는 라이프스타일 사업에도 도전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현재 1000억대 수준의 매출을 2025년까지 5500억원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다.

정 대표는 “카파·까웨와 판권 계약을 맺으며 일본, 태국, 베트남, 호주 등의 브랜드 전개권을 가져왔다. 2~3년 후쯤엔 우리가 기획한 상품을 해외에서 팔 수 있을 것”이라면서 “벌써부터 해외 지사들로부터 언제 상품이 나오느냐는 문의를 많이 받고 있다”고 말했다.

까웨의 2022년 봄 상품. 전체 상품 중 70%를 한국형 상품으로 선보인다. /김은영 기자

◇ “K패션 인재 양성하는 플랫폼 될 것”

롯데지에프알은 롯데쇼핑이 패션사업을 키우기 위해 2018년 6월 출범한 패션 전문 회사다. 수입 브랜드를 운영하던 롯데백화점 패션사업 부문 GF(글로벌 패션)와 여성복 나이스클랍, 티렌 등을 운영하는 패션 자회사 엔씨에프를 통합해 출범했다. 초기엔 아이그너, 훌라 등 12개의 수입 브랜드를 운영했지만, 체질 개선을 위해 비효율 브랜드를 정리했다.

일각에선 명품과 초고가 브랜드로 몸집을 키운 신세계인터내셔날, 한섬(020000)에 비해 롯데지에프알의 구색이 약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정 대표는 “경쟁사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롯데만의 가치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10~20년 후에도 롯데가 패션사업을 의미 있게 할 수 있도록 토대를 다지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가 롯데에 합류한 이유는 엔터프리너십(Entrepreneurship·기업가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라며 “한국의 패션과 창의성을 알리는 브랜드 사업을 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고, 이런 방향성에 롯데도 공감했다”고 했다. 사업과 함께 패션 인재를 양성하는 플랫폼 역할도 수행할 예정이다. 당장 내년부터 지호영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상품을 세계 시장에 선보일 계획이다. “이게 롯데다운 것”이라고 정 대표는 말했다.

정 대표는 롯데지에프알 대표로 부임한 후 조직문화를 만드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2류 회사는 실적을 이야기하고, 1류 회사는 조직문화를 이야기한다”는 게 그의 경영 철학이다. 조직문화를 위한 7가지 원칙도 세웠다. 나이·젠더(성별)·경력·학력을 묻지 않고, 원칙만 지키면 자신만의 스타일로 일할 수 있다. 사내 정치는 징계 사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