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패션업계 오너 2세 여성 경영인들의 경영 능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패션 산업이 직격탄을 맞은 가운데 사업 다각화, 브랜드 경쟁력, 온라인 대응 전략 등이 희비를 갈랐다.

(왼쪽부터) 최혜원 형지I&C 대표, 김지원 한세엠케이 대표, 박이라 세정과미래 대표. /각 사 제공

최병오 패션그룹형지 창업주의 장녀 최혜원 형지I&C(011080) 대표, 김동녕 한세예스24그룹 회장의 막내 딸인 김지원 한세엠케이(069640) 대표, 박순호 세정그룹 회장의 셋째 딸 박이라 세정과미래 대표는 부진한 성적표를 받았다.

최혜원 대표가 6년째 맡아온 형지I&C는 지난해 매출이 전년 대비 34% 줄어든 761억원을 기록했고 영업손실은 53억원으로 적자전환했다. 이 회사는 1분기에도 매출이 5.2% 감소했고, 3억6000만원의 적자를 냈다.

김지원 대표가 이끌고 있는 한세엠케이의 지난해 매출은 2202억원으로 전년 대비 28% 줄었고, 188억원의 적자를 냈다. 올 1분기 매출은 502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7.4% 늘었지만, 영업손실은 7억3400만원을 기록해 적자를 이어갔다.

박이라 대표가 2007년부터 수장을 맡은 세정과미래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33.2% 줄어든 300억원을 기록했고, 적자 규모는 94억원에서 203억원으로 2배 넘게 늘었다.

반면 영원무역그룹 성기학 회장의 차녀인 성래은 영원무역홀딩스(009970) 대표와 패션기업 신세계인터내셔날(031430)을 계열사로 둔 정유경 신세계(004170) 총괄사장은 합격점을 받았다. 정 총괄사장은 백화점을 맡고 있지만, 남편인 문성욱 신세계인터내셔날 부사장과 함께 패션·뷰티 사업에 주도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정 총괄사장은 지난 3월 기준 신세계인터내셔날 지분 15.14%(108만964주)를 보유한 2대 주주다.

성 대표가 2016년부터 이끌어온 영원무역홀딩스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4% 증가한 2조8500억원, 영업이익은 14% 증가한 3408억원을 기록했다. 올 1분기 매출도 640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9.5% 증가했으며, 영업이익은 933억원으로 63% 늘었다.

정 총괄사장의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코로나19 직격탄에 휘청였다. 매출은 6.8% 감소한 1조3279억원, 영업이익은 60% 감소한 338억원에 그쳤다. 그러나 올 1분기 반등에 성공했다. 매출은 지난해 동기 대비 5.7% 증가한 3149억원을 기록했고, 영업이익은 213억원으로 77.5%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이들의 성적을 가른 주요 요인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① 브랜드 경쟁력

패션 사업에서는 소비자를 끌어올 수 있는 파워 브랜드 보유 여부가 실적에 큰 역할을 한다. 세정과미래는 올 3월 유일하게 운영하던 캐주얼 브랜드 '니'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니는 1999년 외환위기 당시 선보인 브랜드다. 중저가 가격대로 인기를 얻어 3년 만에 매출 1000억 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두점(로드숍) 중심의 유통 구조를 고수하면서 브랜드 경쟁력이 약화했다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TBJ·앤듀·버커루 등 캐주얼 브랜드를 운영하는 한세엠케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김 대표가 이끄는 또 다른 비상장 계열사 에프알제이(FRJ)는 현재 청산 절차를 밟고 있다. 한세실업은 2015년 성인 의류시장 진출을 위해 데님 캐주얼 브랜드 FRJ를 35억원에 인수했다.

김지원 대표는 2019년 FRJ 대표이사에 올랐는데, 그해 이 회사의 영업손실은 60억원으로 전년(24억원) 대비 적자 규모가 150% 이상 급증했다. 같은 해 말에는 총 자본이 마이너스 53억원으로 계열사 편입 이후 처음으로 완전 자본잠식(회사의 적자가 계속돼 납입자본금마저 바닥이 난 상태)에 빠졌다.

형지I&C는 남성복 예작·본, 여성복 캐리스노트·본이 등을 보유하고 있지만, 매출 성장을 이끌만한 인기 브랜드를 보유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왼쪽부터) 성래은 영원무역홀딩스 대표,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 /각 사 제공

반면 영원무역홀딩스는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로 소비자 잡기에 성공했다. 영원무역홀딩스는 영원무역그룹의 중간지주회사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업체 영원무역(111770)과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를 운영하는 영원아웃도어를 자회사로 두고 있다.

영원아웃도어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35.7% 늘어난 806억원, 매출은 5.4% 증가한 4327억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2011년 이후 9년 만에 최대 규모다.

코로나19 사태 속 등산에 입문하는 2030세대 산린이(등산과 어린이를 합한 신조어)의 수요가 늘어난 데다가 지난 겨울 '숏패딩' 열풍으로 노스페이스의 대표 제품인 '눕시 패딩' 등의 인기가 높아진 효과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메종 마르지엘라, 셀린느, 아크네스튜디오 등 이른바 '신명품'으로 분류되는 해외 패션 브랜드를 전개한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최근 유통업계 큰 손으로 떠오른 MZ세대(1980년대 출생한 밀레니얼세대와 199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Z세대)의 고가 제품 수요가 급증하면서다.

② 온라인 채널

비대면 소비가 급증하면서 온라인 판로 확보 여부도 실적을 갈랐다.

영원무역홀딩스의 영원아웃도어는 국내 1위 온라인 패션 플랫폼 무신사에 입점한 효과가 컸다. 무신사는 주요 고객인 MZ세대를 기반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영원무역홀딩스는 지난 2018년 노스페이스 대표 제품 눕시 패딩을 무신사에서 처음 판매했다. 이어 이듬해에는 빅샷 백팩 판매를 계기로 브랜드를 정식 입점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자체 온라인몰 에스아이빌리지는 지난해 10월 연간 누적 매출 목표치인 1000억 원을 조기 달성했다. 2016년 출범한 에스아이빌리지의 당해 매출은 27억원 규모였다. 4년 만에 매출이 37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또 지난해 초 선보인 온라인 전용 브랜드 '텐먼스'는 지난해 목표 매출액을 270% 초과 달성했다.

반면 가두점이나 백화점, 아웃렛 매장 중심의 유통 구조에 주력해온 형지·한세·세정은 온라인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들은 뒤늦게나마 자사 및 계열사 온라인몰인 형지몰과 아이스타일24, 세정몰 등을 강화하고 있다.

③ 사업 다각화

사업 다각화의 성공적인 안착 여부도 실적 향방을 가른 요인으로 꼽힌다. 패션 부문의 부진을 만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무역홀딩스의 자회사 영원무역은 지난해 코로나19 여파로 본업인 의류 OEM 사업이 부진했다. 제조 OEM사업 부문의 지난해 매출은 2조3800억원으로 전년 대비 14% 가량 감소했다. 성 대표는 영원무역의 사장직도 겸하고 있다.

반면 자전거 사업이 효자 노릇을 했다. 자전거가 비대면 이동수단 및 인기 야외 스포츠로 급부상하면서다. 영원무역홀딩스는 2013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스위스 자전거 브랜드 '스캇(SCOTT)' 지분을 50.01% 인수했다.

이지영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적으로 자전거 수요가 급증했다"며 "특히 성장세가 두드러진 전기자전거 매출 비중은 지난해 20% 초중반에서 올 1분기 약 30%까지 늘었다"고 분석했다.

정 총괄사장은 일찌감치 신세계인터내셔날의 포트폴리오를 화장품 사업과 라이프스타일(생활용품) 사업 등으로 확장했다. 현재 신세계인터내셔날은 비디비치, 연작, 로이비, 스위스 퍼펙션, 뽀아레 등 자체 화장품 브랜드 5개와 국내 공식 판권을 가진 해외 브랜드를 포함해 총 12개 화장품 브랜드를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