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4년 티메프(티몬·위메프) 미정산 사태 후속 조치로 국회 정무위원회가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을 의결하며 대형 유통업체의 대금 정산주기를 60일에서 35일로 단축하기로 했다. 그런데 정작 국회 소위를 통과한 35일이 정당한 근거 없이 정치적 타협으로 결정된 것으로 파악됐다. 기업의 재무 구조나 상거래 관행에 대한 고려 없이 뚝딱 만들어진 어정쩡한 숫자가 유통업계에 혼란을 초래하고 불필요한 비용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 뚜렷한 근거 없이 35일로 가결한 정무위 법안소위
14일 국회 회의록 시스템에 공개된 지난 1일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2소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여야 의원들은 직매입 거래의 정산 기한을 두고 7일, 20일, 30일, 40일 등 명확한 기준 없이 제각각의 수치를 던졌다. 이 과정에서 정무위 더불어민주당 간사인 박상현 의원의 "한 35일 정도로 하자"는 발언에 따라 35일이 제기됐다. 이에 국민의힘 박성훈 의원은 공정거래위원회를 향해 "왜 35일인지 공정위의 정확한 답변이나 근거가 없다. 그냥 35일이라고 하면 '30일 하시죠', 아니면 '38일 하시죠' 이렇게 결정해도 되는 것 아니냐"며 "왜 40일은 아니고 35일이어야 하는지 설명이 필요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같은 국민의힘 소속 서일준 소위원장은 "(의원들이 제시한 기간이) 30일도 많이 있고, 20일도 있고 한데, 절충을 한 것"이라며 "일단 35일로 통과시키자"라고 했다. 그러면서 "1년 동안 보완하자"는 입장을 취했다.
국민의힘 박대출 의원은 "유통업체가 절대 도산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나. 이렇게 성급하게 결정할 대상이 아니다"라고 비판했지만, 사회민주당 한창민 의원이 "제도 변화에 절대란 없지 않나"라고 맞받아치면서 결국 35일로 가결됐다.
◇ 상거래 관행 외면한 35일 "대혼란 우려"
유통 업계에서는 35일이라는 수치가 상업채권 결제 관행을 완전히 무시한 숫자라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 재무 현장에서 결제 주기는 통상 30일, 60일, 90일 등 월 단위로 운용된다. '월 1회 마감 후 35일 정산'이라는 기준은 기업의 회계 연동, 은행 구매자금 대출, 어음·채권 만기 구조와 박자가 어긋난다. 유통사에 실질적인 유동성 숨통을 터주지도 못하면서, 정산 시스템 전면 재구축 및 마감 주기 재설정 등 행정적·전산적 비용만 낭비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35일 기준은 중소 납품업체의 판로를 위축시키는 역효과 가능성도 있다. 직매입은 유통사가 미판매 재고 위험을 전적으로 부담하는 구조다. 정산주기가 조급해지면 유통사는 자금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회전율이 높은 대기업이나 인기 브랜드 위주로 매입을 줄이게 되고, 중소기업·신생업체의 제품 발주부터 축소될 수밖에 없다.
국제 기준에서도 뒤떨어진다. 미국 아마존, 월마트 등 글로벌 대형 유통업체들은 상품 특성과 거래 유형에 따라 최대 90일까지 정산주기를 탄력적으로 운용한다. 정산주기를 60일에서 30일로 줄이면, 연간 매입원가 1조원 기준으로 추가 비용이 연 50억원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형 유통업체 대금 정산주기가 60일로 굳어진 것은 업계의 오랜 관행이자 전체적인 금융 시스템을 반영한 결과다"라며 "과학적 근거 없이 정치권에서 임의적으로 결정한 날짜 때문에, 유통 현장은 한동안 대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 교수는 또 "결국 대금 정산의 문제는 납품업체와 유통업체의 상호 계약"이라며 "한쪽의 목소리만 듣고 다른 쪽의 목소리를 무시하게 되면 부작용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특히 국내 온라인 플랫폼 기업 중에서 직매입 비중이 높거나 독자적 정산주기를 둔 유통사들은 직격탄을 맞는다. 쿠팡, 컬리, SSG닷컴이 대표적이다. 쿠팡은 월 마감 후 15영업일 뒤 대금을 100% 지급하고, 컬리는 최대 두 달 뒤, SSG닷컴 최대 40일 후에 대금을 정산한다. 네이버 등 오픈마켓 플랫폼은 열흘 이내에 정산하는 체계를 갖고 있다.
이커머스 업계 관계자는 "티메프 사태의 본질은 정산주기가 아닌 판매대금 유용 문제였다"며 "숫자 맞추기식의 정산주기 단축은 대량 매입을 줄여 제조사의 재고 처리와 중소 셀러의 판매 기회만 빼앗는 부작용을 낳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35일 정산주기는 수정될 가능성도 있다. 소위원회 심사는 법안의 세부 내용을 조율하는 첫 단계다. 법안이 최종 확정되기까지는 정무위 전체회의, 법제사법위원회(체계·자구 심사), 국회 본회의 표결이라는 절차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