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장 벤처기업의 복수의결권 제도가 도입 3년이 되도록 활용되지 않는 것은 제도의 취지를 '창업자 특혜'로 잘못 읽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오히려 복수의결권은 투자자의 자금 회수를 돕는 장치에 가깝다는 것이다.
복수의결권은 상법상 '1주 1의결권' 원칙의 예외로, 창업주가 보유한 주식 1주에 여러 개의 의결권을 부여해 적은 지분으로도 경영권을 지킬 수 있게 하는 제도다. 현재까지 이를 도입해 주식을 발행한 기업은 콜로세움코퍼레이션과 하이리움산업 등 단 2곳에 불과하다.
24일 서울에서 열린 기업 지배구조 세미나에서 발제를 맡은 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 원장은 미국 뉴욕증시에 상장한 쿠팡의 29배 복수의결권 구조를 사례로 들었다. 유 원장은 "쿠팡 상장 당시 주요 재무적 투자자(FI)들이 대규모 지분을 보유해 오버행(잠재적 대량 매도) 이슈가 불거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며 "이를 방지하고 창업자에게 경영을 온전히 일임하기 위해 29배 구조가 도입된 측면이 크다"고 했다.
유 원장은 이 구조의 핵심을 '투자자 보호'로 규정했다. 그는 "창업자가 자기 주식은 팔지 않고 회사와 끝까지 가겠다고 묶이는 대신, 투자자들은 언제든 시장에서 팔고 나가도 좋다는 개념"이라며 "실제로 김범석 의장이 보유한 클래스B 주식은 상장돼 있지 않고, 매각하는 순간 일반주식(클래스A)으로 전환돼 의결권이 1주당 1표로 축소된다"고 했다. 상장 직후 지분을 팔아 사익을 챙기는 행위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대신,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는 효과가 난다는 설명이다. 클래스B 주식은 전량 김 의장이 보유하고 있으며, 주식 수 기준 지분율은 8.7%지만 29배 의결권을 적용한 의결권 비중은 73.3%에 달한다.
2023년 11월 시행된 벤처기업법상 복수의결권 주식은 비상장 벤처기업 창업주에게만, 1주당 2~10개 의결권 범위에서 발행할 수 있다. 창업주는 발기인으로 참여해 지분 30% 이상을 보유한 최대주주여야 한다. 시행령은 창업 이후 100억원 이상 투자를 받고 최종 투자금액이 50억원 이상일 것을 요건으로 뒀고, 존속기간 만료·상속·양도·창업주의 이사직 상실·상장 후 3년 경과 시 보통주로 전환되도록 했다. 유 원장은 "복수의결권을 창업자에 대한 엄청난 인센티브라고 생각하니 조건을 지나치게 까다롭게 만들어 놨고, 결과적으로 도입 사례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토론에서도 성장 단계별로 지배구조를 달리 봐야 한다는 의견이 이어졌다. 김범준 가톨릭대 회계학과 교수는 "1주 1표라는 주주 평등 원칙을 지키면서도 성장 기업에는 창업자의 장기 책임경영을 유도할 수 있는 지배구조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지윤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규모 외부 자본을 유치해야 하는 스타트업에는 경영권 안정 장치가 유용하게 작동할 수 있다"면서도 "제도 남용을 막는 견제 장치가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김희경 법무법인 도영 대표변호사는 "좋은 기업은 국경을 골라 갈 수 있는 시대인데 한국은 기업을 붙잡을 매력도, 투자자를 안심시킬 신뢰도 부족하다"고 했다.
이날 세미나에는 조우제·임재현(서울대 경영학과), 신동혁·박상찬(KAIST 경영공학과), 조대곤(연세대 경영학과), 권남호(숭실대 행정학과), 김형진(명지대 미래융합경영학과) 교수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이번 세미나를 시작으로 K-거버넌스 논의를 정례화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