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플러스가 임시 휴업 중인 점포 67곳의 영업 정상화에 나선다고 22일 밝혔다. 사진은 서울 시내 홈플러스 매장 모습./연합뉴스

파산 위기에 몰렸던 홈플러스가 급한 불을 끄고 영업 정상화에 나선다. 서울회생법원이 지난 21일 회생절차 폐지 결정을 취소하며 회생계획안 확정 기한을 9월 4일까지 늦춰준 덕에, 당장 문을 닫는 최악은 피하고 시간을 벌었다. 앞서 최대 채권자인 메리츠금융이 MBK파트너스와 김병주 회장의 연대보증을 조건으로 2000억원 대출을 의결한 덕이다.

한숨 돌린 홈플러스는 곧바로 재개장 채비에 들어갔다. 자금이 들어오는 대로 임시휴업 중인 67개 핵심 점포를 다시 열고, 대출금 상당 부분을 상품 대금에 우선 투입해 회전율이 높은 생필품부터 매대를 채운다는 계획이다. 재개장 점포는 복층을 1000평 안팎 단층으로 줄이고 식품·자체 브랜드(PB)·고회전 생필품 위주로 파는, 미국 '트레이더조(Trader Joe's)'와 유사한 모델로 손질한다. 트레이더조는 판매 상품의 80% 이상을 PB로 채운 마트다. 대형마트처럼 품목 수를 늘리는 대신 상품 종류를 과감히 줄여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취지다.

정상화의 관건은 매대를 채울 협력사들이다. 다만 이들은 납품 재개에 아직은 미온적이다. 억대 미정산 대금을 언제 받을지 불투명한 데다, 경영진이 무너진 신뢰를 회복할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 "경영진 어떻게 믿나... 정산 주기 단축 필요"

2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홈플러스에 여성 속옷을 납품해 온 비비센스가 대표적이다. 홈플러스 매출 비중이 70~80%에 달하는 이 회사는 미정산 대금 6억원에 전용 재고 10억원까지 묶였고, 직원은 올 초 9명에서 3명으로 줄었다. 남은 직원 급여는 대표가 카드론으로 메우고 있다. 김종필 대표는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매각 대금이 들어오면 결제하겠다는 말만 믿고 지난 6월 말까지 납품했다가 사흘 뒤 영업 중단 결정에 뒤통수를 맞았다"고 했다. 그는 "미수금을 어떻게 하고 앞으로 결제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하겠다는 게 하나도 없는데, 납품을 하겠다 말겠다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현재 50일 수준인 정산 주기 단축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그는 대체 판로를 단기간에 찾기 어려운 탓에 홈플러스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쪽이다. 김 대표는 "인수자가 나올 때까지라도 영업을 이어가는 게 가장 바라는바"라고 했다.

커피·스낵·세제를 납품하며 매출의 70%를 홈플러스에 기대는 영앤스마트그룹은 미정산 대금이 6억8000만원이다. 장윤성 대표는 신뢰 회복의 조건으로 경영진 쇄신과 제3자 개입을 강조했다. 그는 "미정산 대금 지급만으로는 안 된다"며 "지난 1년간 관리·감독 없이 읍소해서 물건 받아 돌려막기식으로 운영해 온 MBK파트너스와 경영진을 못 믿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매물로 나와 새 주인이 오는 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이고, 어렵다면 유암코(연합자산관리) 같은 기관이 개입해 정상화 방향을 잡아주는 것도 방법"이라며 "핵심은 신뢰 회복을 위해 실행 가능한 로드맵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홈플러스 비중이 크지 않은 업체들은 등을 돌리는 곳도 있다. 홈플러스 판매 비중이 20%라는 한 업체 임원은 미정산 9억5000만원에 재고까지, 현금 20억원가량이 묶였다고 했다. 매출 100억원대 중소기업엔 치명적인 규모다. 이 업체는 지난 5월 납품을 끊었고, 영업이 재개돼도 돌아갈 뜻이 없다고 했다. 이 임원은 "어떤 조건을 내놔도 홈플러스와는 다시 계약 못 한다"며 "2000억원이 들어온다는데 업체엔 이메일 한 통, 공지 하나 없었다. 협력사를 완전히 제3자 취급한다"고 했다. 그는 남은 재고는 제값을 못 받더라도 다른 채널을 통해 처리할 방침이다.

실제 홈플러스 의존도가 높을수록 타격은 컸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납품 중소상공인 150곳을 조사한 결과 10곳 중 8곳이 대금 정산 지연으로 경영난을 겪었고, 매출 비중이 50~100%인 업체는 100%가 "매우 어려움"이라고 답했다. 평균 미정산액은 7억7400만원, 응답 업체의 98.0%가 60일 넘게 대금을 받지 못했다.

경기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매장인 홈플러스 파주운정점에 매대가 비어 있는 모습./연합뉴스

문제는 협력사 신뢰를 되돌릴 홈플러스의 실탄이 넉넉하지 않다는 점이다. 홈플러스는 확보한 2000억원 중 상당 부분을 영업 재개를 위한 상품 대금에 우선 투입하고, 연체된 임대료·공공요금 등 매장 운영에 필수적인 비용과 지급이 밀린 6월분 직원 급여 332억원도 함께 지급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미지급 상거래채권 7940억원을 포함한 공익채권이 9400억원에 달해, 2000억원으로는 곳곳에 난 구멍을 메우기에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지난해 대금 미정산으로 판매자 신뢰가 무너진 '티메프(티몬·위메프)' 사태가 대형마트에서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인수자를 찾지 못한 위메프는 파산 수순을 밟았고, 오아시스에 인수돼 지난해 법정관리를 졸업한 티몬은 1년이 지나도록 영업 재개조차 못 하고 있다. 피해 판매자에 대한 상거래채권 변제율이 0.75%에 그친 탓에 등을 돌린 상당수 셀러가 돌아오지 않은 탓이다. 오아시스는 티몬을 1만여 파트너사의 상품 100만여개에 자사 새벽배송 노하우를 얹은 종합 이커머스 플랫폼으로 재출범한다는 구상이지만, 기존 판매자 반발 등으로 카드사 결제망 연동이 막히며 영업 재개 일정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 매대 채우기부터 법원 추가 판단까지 '첩첩산중'

홈플러스 앞에는 두 개의 관문이 놓여 있다. 첫 번째는 영업 정상화다. 67개 점포를 다시 열더라도 텅 빈 매대를 채우려면 협력사와 납품 조건부터 다시 협상해야 한다. 대금 회수를 걱정하는 협력사들이 곧바로 물건을 넣어줄 리 없어, 단가 등 조건 합의에 적잖은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홈플러스 측은 "업체마다 납품 조건이 다른 만큼 개별 접촉으로 협의해 나가겠다"며 "최대한 빨리 문을 열어야 하는 상황이라 서두르겠다"는 입장이다.

두 번째 관문은 법원의 판단이다. 지난 3일 폐지 결정은 회생계획안 자체가 부실해서가 아니라 이를 실행할 운영자금이 없다는 이유였다. 2000억원 확보로 그 걸림돌이 걷힌 만큼, 법원은 9월 4일까지 홈플러스가 제출한 수정 회생계획안을 평가해 승인 여부를 확정한다. 이번이 세 번째 연장으로, 9월 4일은 더 늦출 수 없는 법정 최종 기한이다. 채권단 의견은 절차상 반영될 뿐 법원이 반드시 따르는 것은 아니어서, 채권단이 반대하더라도 법원이 직권으로 승인할 수 있다. 반대로 법원이 계획안을 끝내 승인하지 않으면 회생절차는 폐지되고, 인수자를 찾지 못하는 한 파산 절차로 넘어간다. 이 경우 대규모 실업이 발생하고 협력사·소상공인의 연쇄 도산도 불가피하다. 업계 관계자는 "홈플러스의 운명은 2000억원의 운영자금보다 협력사의 신뢰를 얼마나 회복하느냐에 달렸다는 평가가 나온다"며 "법원의 회생계획 승인 역시 영업 정상화 가능성을 얼마나 입증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했다.

☞트레이더조는

트레이더조는 미국에 600여 개 매장을 둔 마트 체인이다. 온라인 판매도, 할인 쿠폰이나 포인트 적립도 없이 오로지 저렴한 가격과 매장 경험으로 충성 고객을 거느린 곳으로 유명하다. 수만 개 상품을 파는 여느 마트와 달리 4000여 개만 취급하고 그중 80%를 자체 브랜드(PB)로 채우는 '소품종 전략'을 내세운다. 2023년 냉동 김밥을 들여와 '케이(K)푸드 열풍'의 무대가 된 곳으로도 익숙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