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의 대다수 기업은 창업자의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에 의존해 움직였다. 이병철 회장이 이끈 삼성과 정주영 회장이 이끈 현대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에서 최고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지금 이들 기업은 총수 혼자 경영을 책임지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총수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각 분야를 관리하고 미래를 위한 최종 의사 결정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이른바 '키맨(keyman)'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요 기업들의 키맨을 소개하고 이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과제가 무엇인지 짚어본다. [편집자주]
지난 5월 서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 세계 유통업계의 거물이 방문했다. 주인공은 '명품 제국의 황제'로 불리는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이었다. 루이비통, 디올, 셀린느 등을 거느린 LVMH를 이끄는 아르노 회장의 방한은 큰 관심을 모았다.
이날 서울 롯데백화점에선 신동빈 회장이 서울 잠실 롯데타워에서 아르노 회장을 환대했다. 3년 전 아르노 회장이 방한했을 땐 호텔신라의 이부진 사장이 맞이했다. 그런데 이날 ㈜신세계(004170)에서 아르노 회장을 맞이한 인물은 정유경 회장이 아니었다. 박주형 ㈜신세계 대표이사였다.
박 대표는 1시간 30분가량 아르노 회장과 함께 강남점 곳곳을 둘러봤다. 최근 선보인 스위트파크와 하우스 오브 신세계 등 강남점의 공간 혁신 사례를 소개하며 신세계백화점이 그리고 있는 미래 전략을 설명했다. 유통업계에서는 이 장면을 박 대표가 정유경 회장의 '복심'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평가한다. 글로벌 파트너와의 협력부터 백화점의 미래 전략까지, 정 회장을 대신해 신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경영자라는 의미다.
◇ 정유경이 선택한 40년 신세계맨
20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박 대표가 신세계의 핵심 경영자로 부상한 배경에는 정유경 회장의 승진이 있었다. 2024년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이 회장으로 승진하면서 백화점 부문의 경영 체제에도 변화가 생겼다. 정 회장은 그동안 총괄사장으로 백화점 사업을 직접 이끌었지만, 회장으로 역할이 확대되면서 개별 사업 운영보다 그룹 차원의 전략과 미래 방향에 집중할 필요성이 커졌다. 오너가 직접 책임지는 체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신세계의 미래 방향을 실행할 적임자를 찾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이 맡았던 총괄사장 직책에 한동안 후임자를 두지 않고 비워졌던 이유다. 장고 끝에 역할을 맡은 인물이 박 대표였다. 2025년 인사에서 신세계그룹 내 승진자는 박 대표와 문성욱 시그나이트 대표 두 명뿐이었다.
박 대표의 강점은 신세계를 누구보다 잘 안다는 점이다. 1985년 입사 이후 경영기획과 재무, 전략, 백화점과 이마트를 두루 거치며 그룹의 핵심 보직을 경험했다. 1959년생인 박 대표는 광주고와 동국대 회계학과를 졸업한 뒤 1985년 신세계 경영관리과에 입사했다. 이후 경영기획실, 경영관리팀, 경영지원실 등을 거치며 그룹 운영의 기본기를 쌓았다. 2002년 상무보로 임원 반열에 오른 이후에는 백화점 지원본부장, 이마트 전략경영본부장, 이마트 경영지원본부장, 신세계 지원본부장 등을 맡으며 그룹 내 주요 사업을 두루 경험했다.
그의 경력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특정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백화점 현장을 이해했고, 이마트의 경영 전략을 경험했으며, 동시에 재무와 조직 운영을 담당하는 지원 조직을 거쳤다. 사업 현장의 감각과 숫자를 기반으로 판단하는 관리 역량을 함께 갖춘 셈이다.
신세계그룹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 백화점 공간 전략 바꾼 핵심 인물
박주형 대표의 경영 색깔을 보여주는 첫 번째 무대는 부산 신세계센텀시티였다. 지금은 세계 최대 규모 백화점 중 하나로 알려진 신세계센텀시티는 단순한 점포 확장이 아니었다. 쇼핑 공간을 넘어 문화와 휴식을 결합한 복합 라이프스타일 공간이라는 새로운 백화점 모델을 제시한 프로젝트였다.
신세계센텀시티의 출발은 치열한 경쟁에서 시작됐다. 2004년 부산 센텀시티 부지 입찰 당시 시장에서는 롯데가 사업권을 가져갈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우세했다. 부산은 지역 연고에 따른 롯데의 '텃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세계는 마감 직전 입찰에 뛰어들며 사업권을 확보했고, 부산의 새로운 중심 상권을 선점했다.
개발 과정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변수도 있었다. 백화점을 짓던 중 온천수가 발견된 것이다. 일반적인 개발이었다면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신세계는 이를 차별화 요소로 활용했다. 온천을 활용한 스파 시설을 도입하면서 쇼핑과 휴식을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백화점을 선보였다.
신세계센텀시티가 보여준 것은 단순히 규모를 키운 백화점이 아니었다.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는 공간을 넘어 머무르고 경험하는 공간으로 백화점의 역할을 확장한 것이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박 대표는 이러한 신세계의 공간 전략을 이해하고 발전시킨 핵심 인물로 꼽힌다"고 했다.
박 대표를 설명하면서 '강남'을 빼놓을 수 없다. 박 대표는 2016년부터 신세계센트럴시티 대표이사를 맡았다. 센트럴시티는 단순한 터미널 시설이 아니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JW메리어트호텔, 고속버스터미널이 결합된 서울 핵심 복합상권이다.
박 대표는 이 공간을 각각의 시설이 아닌 하나의 사업으로 바라봤다. 2012년 신세계가 센트럴시티 지분 60.2%를 약 1조원에 인수하는 과정에도 참여했고, 이후 백화점과 호텔, 상업시설을 연결하는 복합 개발 전략을 추진했다. 신세계센텀시티가 박 대표의 공간 경영 철학을 보여준 시작점이었다면, 강남점은 이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었다.
디저트 전문관 스위트파크, 식음·문화 콘텐츠를 결합한 하우스 오브 신세계, 프리미엄 식료품관 신세계 마켓 등 최근 강남점의 변화는 단순한 MD 개편이 아니다. 방문객의 체류 시간을 늘리고 경험을 확장하는 공간 혁신의 결과물이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박 대표는 유통을 단순히 '점포 운영'으로 보지 않는다. 좋은 상품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소비자가 어떤 공간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 만들 것인지가 백화점의 경쟁력을 결정한다고 강조한다"고 했다.
◇ 청사진은 '라이프스타일 디벨로퍼'
박 대표는 2025년 정기 주주총회에서 비전을 밝혔다. 그는 "오랜 업력을 통해 쌓아온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리테일을 넘어 소비자에게 진일보한 가치를 제안하는 '종합 라이프스타일 디벨로퍼'로 자리매김하겠다"고 했다.
박 대표는 최근에도 '이제껏 보지 못한 백화점'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광주, 송도, 수서, 센텀C, 반포 등 대규모 복합개발 프로젝트가 줄줄이 남아 있다. 모두 신세계의 새로운 성장 축이다.
특히 서울 반포 신세계센트럴시티 개발은 박 대표의 역량을 가늠할 중요한 시험대다. 강남 핵심 입지를 어떻게 재해석하고 신세계만의 공간 경쟁력으로 연결할지가 관건이다. 신세계는 서울 서초구 센트럴시티 일대를 일본 도쿄의 아자부다이 힐스(Azabudai Hills)나 롯폰기 힐스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랜드마크 복합단지로 개발할 계획이다.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이를 위해선 관(官)과의 효율적인 소통이 필요한데 박 대표만큼 이를 잘 수행할 사람도 없다"고 했다.
재계 관계자는 "정유경 회장이 신세계의 미래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이라면, 박주형 대표는 그 방향을 현실의 사업과 공간으로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며 "40년 가까이 신세계 안에서 성장한 박 대표가 마트와 백화점 계열 분리를 앞둔 정유경 체제의 핵심 실행자로 평가받는 이유"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