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7일(현지 시각) 튀르키예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났지만, 한·미 현안으로 떠오른 쿠팡 문제는 꺼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 참석차 방문한 튀르키예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주최한 공식 환영 만찬 도중 트럼프 대통령과 만났다. 두 정상은 군용 선박 건조 후속 협의를 하고 방미·골프 회동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달 프랑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이후 3주 만의 만남이었지만, 쿠팡 사태는 거론되지 않았다.
"한국이 미국 기업을 차별했다"는 취지의 미국 하원 법제사법위원회 '쿠팡 보고서' 파장이 한·미 통상·외교 현안으로 번지는 가운데 나온 만남이어서 주목됐지만, 정부는 신중 모드를 유지하는 모양새다. 지난 8일 산업통상부와 더불어민주당의 비공개 당정 협의에서도 쿠팡 현안은 일단 테이블에 오르지 않았다.
반면 국회에선 여권을 중심으로 반발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정무위원회를 중심으로는 미 하원 보고서를 정면 반박하는 자료집이 등장하고, 이를 백악관·주한 미국대사관에 조직적으로 전달·항의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위)는 올해 국정감사에서 쿠팡의 대미(對美) 로비 실태를 따지는 '쿠팡 2라운드'를 예고하는 등 쿠팡 사태가 하반기 정국의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
◇ 쿠팡과 직접 얽힌 미 행정부 핵심 인사들
9일 정부와 관련 업계에 따르면 이 대통령과 한국 정부가 쿠팡의 일방적인 주장에 반기를 들지 못하는 배경엔 트럼프 대통령과 미 행정부 핵심 인사들이 쿠팡과 직접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 정부윤리청(OGE)이 최근 공개한 재산 신고 내역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5월까지 자산운용사를 통해 쿠팡 주식을 18차례 매매한 것으로 나타났다.
통상·외교 핵심 인사들도 마찬가지다.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변호사 시절인 2024년 쿠팡에서 1만달러(약 1500만원)의 강연·자문료를 받았고, 앨리슨 후커 국무부 정무차관도 취임 전 쿠팡에 컨설팅을 제공하고 보수를 받은 것으로 신고됐다. 쿠팡은 올 1분기에만 109만달러(약 17억원)를 들여 백악관·의회·무역대표부(USTR) 등을 상대로 전방위 로비를 벌였다.
◇ 정치권 "쿠팡 대미 로비 실태 끝까지 규명할 것"
국회 분위기는 정부와 사뭇 다르다. 정무위원회 소속 김현정 민주당 의원은 "보고서가 쿠팡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대변하고 아무런 근거가 없다"며 반박 국·영문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를 백악관과 주한 미국대사관에도 전달할 계획이다. 그는 "쿠팡이 유출 규모를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3755만명 유출로 결론 낸 사안을 보고서는 전직 직원이 저장한 계정 약 3000개에 그친다는 점만 부각했고, 국가정보원 지시설도 "쿠팡 자료와 증언에 전적으로 의존한 일방적 주장"이라는 것이다.
산자위 여당 간사 장철민 민주당 의원도 페이스북에 쿠팡이 어떤 자료를 어떤 경로로 미 의회에 넘겼는지, 그 과정에서 국가 안보 관련 문서가 무단 반출된 것은 아닌지 반드시 따지겠다고 밝혔다. 그는 산업통상부의 정면 반박을 촉구하는 한편, 쿠팡의 대미 로비 실태를 끝까지 규명하겠다며 작년에 이은 국정감사 '2라운드'를 예고했다.
◇ 쿠팡 보고서, 하반기 정국 뇌관으로
파장의 진원지인 미 하원 법사위 보고서는 쿠팡 국내 법인의 임시 대표 해럴드 로저스의 증언을 토대로 한국 정부의 조치를 지난해 한·미 무역 합의(미국 기업 비차별 약속) 위반으로 규정하고 무역법 301조 대응을 촉구했다. 보고서엔 사건 이후 한국 정부가 벌인 조사 40건 중 33건이 유출과 무관했고, 자료 요구가 4229건, 직원 면담이 652회에 달했다는 수치가 담겼다. 또 국정원이 지난해 12월 쿠팡과 230여 차례 통화하며 유출 데이터가 담긴 기기를 중국 현지에서 회수해 오도록 지시했다는 쿠팡 측 주장도 실렸다.
백악관마저 이 보고서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가운데 야권 일각에선 정부의 대응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은 페이스북에 "이재명 정부는 '정부 입장을 충실히 전달 중'이라고 했고, 김민석 (당시) 국무총리 등이 수차례 방미해 설명했지만 씨알도 안 먹힌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쿠팡 한 회사의 문제가 아니라 이재명 정부 외교력의 수준이 떨어졌고, 한·미 동맹이 그만큼 멀어졌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쿠팡 보고서를 놓고 여당은 쿠팡을, 야당은 정부를 겨냥하면서 사태는 국내 정치 공방으로도 번지는 양상이다. 민주당이 예고한 '2라운드'가 현실화하면 쿠팡의 대미 로비와 자료 반출 경위 등이 또다시 하반기 정국의 뇌관이 될 전망이다.